[K-VIBE] 노석준의 메타버스 세상...단테가 만든 가상공간-①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이에 연합뉴스 K컬처 팀은 독자 제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주간으로 게재하며 K컬처 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노석준 RPA 건축연구소 소장.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전문가. 고려대 겸임교수 역임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문에 새겨진 글귀로,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표현대로라면,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고통과 절망만이 가득한 곳이 지옥일 테니 꿈에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이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끊임없이 지옥을 비롯한 사후 세계를 궁금해하고 상상해왔다. 아마도 현실을 초월한 상상의 세계 중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곳이 바로 '사후 세계'일 것이다. 사후 세계는 상상 속 이야기로만 전해질 뿐,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죽음 너머의 세상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죽음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종착할 곳이기도 하다.
인류 최대의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 각 시대의 내로라하는 천재들은 문학이나 미술, 인문학, 과학, 기술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이 상상하고 해석한 사후 세계를 창조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경에서 묘사된 사후 세계는 천국, 연옥, 지옥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는데,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생생한 가상성(virtuality)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사후 세계 역시 여느 신화적 스토리들처럼 원래는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글로 옮겨져 책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각 시대의 천재들이 재능과 상상력을 동원해 《성경》에서 묘사된 천국, 연옥, 지옥의 사후 세계를 글, 그림, 공간 등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재현했다. 더불어 자기 창조물을 매개로 당대와 후대의 사람들에게 사후 세계와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교감과 소통을 이어왔다.
'신곡'에 숨겨진 단테 코드
단테가 1308년~1321년에 저술한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은 사후 세계 여행을 주제로 한 서사시다. 지옥 편, 연옥 편, 천국 편의 각 33곡과 서곡을 포함해 총 100곡으로 이루어진 이 서사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 이를 대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중심으로 서구의 기독교 문명을 집대성한 문학 작품이다. 작가와 같은 이름의 여행자 단테는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두스의 안내를 따라 지옥-연옥-천국으로 여행한다. 단테는 그곳에서 신화와 역사 속에 나오는 수백 명의 인물을 만나고,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죄와 벌, 기다림과 구원에 관한 철학적·윤리적 견해를 나눈다. 이러한 내용은 중세 시대의 신학과 천문학적 세계관을 광범위하게 전하고 있다.
단테는 이 책을 통해 천국, 연옥, 지옥의 사후 세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오랜 시간을 지나오며 탄생한 수많은 결과물 중에서도 단테의 신곡에서 그려진 사후 세계는 단연 최고였다. 단테의 천재적 상상력과 공간적 기획력으로 탄생한 가상 공간은 이전 창조물들과는 확연하게 차별될 정도로 정교하고 생생했다. 그리고 천국, 연옥, 지옥 등으로 이루어진 사후 세계를 각각 동떨어져 존재하는 공간으로 묘사했던 과거와는 달리, 신곡은 이들을 모두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해놓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주하게 될 사후 세계의 이미지를 거의 완벽
할 정도로 시각화하고 공간적으로도 이해하게 됐다.
단테가 묘사한 사후 세계는 단지 언어적인 표현만 정교해진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단테는 가상적 사후 공간을 묘사하며 건축가가 공간을 설계할 때 필요한 모든 중요한 요소를 고려했다. 공간이 가져야 할 기하학적 특성, 스케일, 건축 재료, 구조적 특성, 공간 프로그램의 구분, 순환의 동선까지 거의 모든 요소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반영한 것이다.
다음 그림은 단테가 신곡에서 표현한 세 가지 사후 세계인 천국, 연옥, 지옥의 마스터플랜이다.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국, 연옥, 지옥의 세계는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기능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로 연결돼 있다. 단순히 단테의 상상력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천재적인 상상력과 더불어 당시의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창조됐다.
이 세 가지의 사후 세계는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지옥과 연옥을 원뿔형 공간으로 묘사하고, 원뿔의 기하학적 특성을 활용해 각 공간이 단계적이고도 순환적으로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게 했다. 즉, 원뿔의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 각 공간이 공간 프로그램을 독립적으로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이어지도록 했다.
단테는 작품 속 정교한 공간 디자인을 통해 세 가지의 사후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고, 천국, 연옥, 지옥이라는 세 가지의 다른 공간적 프로그램이 어떻게 배치되는지 그 관계를 구성해냈다. 심지어 이 가상의 사후 세계와 현존 세계인 지구와의 관계까지 만들어냈다.
이는 단테 개인의 천재적인 재능을 넘어 인류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막연히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사후 세계의 가상적 공간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구체적인 실체적 공간으로 펼쳐진 것이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사후 세계에 관한 더욱 구체적인 시각과 공간적 경험의 토대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테가 새롭게 탄생시킨 사후 세계의 이미지는 이후 인류 역사에서 묘사된 모든 사후 세계의 모델이 되었다. 심지어 미켈란젤로도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된 지옥과 천국을 참고했다. 또 고전 문학이나 현대 소설,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 2006)와 '인페르노'(Inferno, 2016) 등의 영화에서도 단테의 '신곡'을 기초해 사후 세계를 묘사했다.
단테는 왜 공간에 주목했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순간의 멈춤이 아닌 일정한 시간 동안 연속으로 벌어진다. 즉, 모든 사건은 동영상이나 영화처럼 하나의 스토리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정적인 표현물은 스토리의 연속성을 표현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한 폭의 그림 속에 스토리의 연속성을 담을 수 없기에 화가는 가장 대표적이고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 표현한다. 대부분의 그림이나 벽화가 사건 그 자체의 순간적 찰나에 집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듯 사건에 집중한 그림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힘이 있으나, 사건 전체의 맥락과 구조, 사건이 벌어진 배경인 공간을 표현하는 데는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 최고의 가상공간이라 할 수 있는 사후 세계를 창조하는 데는 더더욱 그 한계가 분명하다. 화가는 한 폭의 그림에 특정 사건을 극적으로 표현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주력했기에 사건의 배경이 되는 공간의 종합적인 이해나 표현, 나아가 공학적 분석은 중요한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그 누구도 천국, 연옥, 지옥 등의 가상공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 작품에 표현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테는 달랐다. 그는 작품에 사후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먼저 공간을 연구했다. "천국, 연옥, 지옥이라는 가상의 공간들은 얼마나 클까?", "어떤 형태로 생겼을까?", "이 공간들은 어떤 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을까?" 등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당대의 모든 학문을 동원해 답을 찾아갔다.
단테는 왜 이토록 사후 세계의 공간을 완벽하게 디자인하려 했던 것일까? 신곡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후 세계의 공간을 공학적으로 디자인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신곡의 주인공인 여행자가 바로 그 자신인 단테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두스의 안내에 따라 직접 천국, 연옥, 지옥을 여행한다. 여행자가 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설정을 세우려면 결국 실질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사후 세계의 공간을 직접 이동하고 움직이면서 보고 경험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하므로 모든 공간의 형태와 구조, 크기, 재료 등이 정확하게 분석되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회화나 벽화에서 표현되는 가상 세계는 창조자가 단순한 관찰자에 그친다. 화가는 특정 사건을 관찰하면서 그중 하나의 순간을 포착해 그림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신곡'의 경우에는 단테 자신이 여행자가 되어 천국, 연옥, 지옥으로 여행해야 하니 단순한 관찰자로 머물 수 없다. 작품 속에서 단테는 사후 세계라는 가상의 공간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참여자여야 했다.
이런 이유로 단테는 공간의 구조는 물론이고 재료, 공간의 프로그램, 동선 등 공간을 디자인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요소를 연구했다. 마침내 그의 여행 스토리 '신곡'을 담기 위한 가상의 거대한 공간 무대를 완벽하게 디자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는 단순한 가상의 공간 무대를 뛰어넘는, 가상성을 토대로 공학적인 디자인까지 갖춘 하나의 완벽한 공간적 기계(machine)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곡의 탄생은 인류 역사상 사후 세계라는, 인류가 가장 관심을 갖는 가상성의 공간을 공학적으로 설계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후 세계라는 가상성이 가득한 공간을 마치 실제 현실에 구현해낼 정도의 구체적인 사후 세계의 토폴로지(topology) 공간 모델을 제공한 것이다.
<정리 : 성도현 기자>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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