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분단 상징 속초 아바이마을…실향민문화축제 14일 개최
한국전쟁 후 고향과 가까워 정착…피난민 고단한 삶 흔적 남아
(속초=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한겨울 망망대해에서 떠밀렸어. 추웠던 기억밖에 없어."
속초 실향민촌인 아바이마을에서 만난 김철환(87)씨는 실향민 1세대로, 이곳에 정착한 지 70년이 넘었다.
기나긴 세월에 참혹했던 기억은 흐릿해지고, 몹시나 추웠던 그때만 생생하다.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13세 나이로 부모님 손을 잡고 고향인 북한 신포마을을 떠나 월남했다.
피난민들은 후퇴하는 미군 군함을 얻어 타려 바닷가에 인산인해로 몰렸다. 결국 조악한 고깃배를 타고 한 달 넘게 동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내려왔다.
부산에서 3년간 피난 생활을 하다 전쟁이 끝나고 포항을 거쳐 속초시 청초호 주변 청호동에 수저와 밥주발뿐인 봇짐을 내렸다.
잠시 머물더라도 언제든 배를 타고 고향으로 출발할 수 있는 바닷가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하꼬방'(판잣집)이라는 곳에서 살아야 고향을 가지라는 마음으로 버티었다"며 70년 넘은 실향의 삶을 회상했다.
다른 기억은 몰라도 어릴 적 고향 기억은 또렷하다.
이따금 머릿속에 마을 골목, 친구 집, 지도가 펼쳐진다.
누군가 집에라도 찾아오면 고향의 기억을 실감으로 나누기 위해 함경도 신포군 고향 사진을 끼고 산다.
그가 정착한 아바이마을은 속초 행정구역상 청호동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실향민들이 집단으로 정착한 곳이다.
정착 초기 함경도 실향민 1세대 '아바이'들은 곧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기에 판잣집도 부럽지 않은 움막 속에서도 타향살이를 버텼다.
청호동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모래땅이었다.
타향살이가 길어지면서 바닷바람에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움막에 판자를 덧대 생활 터전을 일궜다.
낮은 등급의 폭풍주의보에도 뜬눈으로 지새우며 가족의 밤을 지켰다.
공산 치하가 싫어 남쪽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은 굳은 단결력과 강인한 생활력을 기반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당시 피난민이 가진 유일한 재산은 '몸뚱이'(노동력)뿐이었다.
이들이 생계로 삼은 고기잡이와 배 만드는 기술은 지역 산업을 일구는 동력이 되고 도시의 정체성이 되었다.
현재도 아바이마을에는 함경도 마을 이름으로 소통하고 길 안내를 대신한다.
외로운 타지의 삶을 이기게 해준 것은 고향마을 사람들이었다.
바닷가를 따라 신포마을, 정평마을, 단천마을, 신창마을, 이원마을 등 고향 지명을 딴 집단촌을 이루게 됐다.
처음 마을에 정착했을 1954년 전후에 20∼30가구에 불과했던 이 마을에는 한때 100가구가 넘는 실향민이 거주했다고 기록에 남겨져 있다.
속초시 관계자는 "정확한 집계는 아니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아바이마을과 인근 주변을 합쳐도 1세대 실향민은 10여명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청호동에 타지에서 온 거주자와 1∼4세대 실향민 가족을 포함해 약 5천명이 아바이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있다.
급변하는 남북관계에 따라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애환이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진 이곳은 분단의 아픔과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적 공간이 되기도 했다.
아바이마을도 도시화로 인해 북한 사투리와 풍속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그 시절 가옥만을 통해 당시 실향민의 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아바이마을 통로 역할을 한 갯배는 옛 풍경 속 서정을 불러일으키는 체험관광상품이 됐다.
아바이마을 해변에는 북쪽으로 고향을 그리는 망향비가 세워져 있고, '남한의 함경도'로 불린 청호동은 지붕마다 덧댔던 장막을 털고 신시가지로 탈바꿈했다.
마을 남쪽으로는 속초해수욕장과 대형마트가 자리 잡고, 북쪽으로는 크루즈터미널, 서쪽으로는 청초호와 어판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맛은 살아있다.
해변을 따라 오징어순대, 식해와 젓갈 등 함경도식 실향민 음식점이 고향 이름을 달고 명맥을 잇고 있다.
갯배 선착장 주변은 실향민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물과 드라마 촬영지 포토존이 있으며, 2016년에는 문화전시 공간 '아트플랫폼 갯배'가 조성됐다.
예전에는 갯배로만 갈 수 있었지만, 육로도 연결됐다.
2012년 아바이마을 위를 가로지르는 설악금강대교가 개통돼 다리 위에 바라보는 속초 앞바다와 조도, 청초호, 설악산 울산바위는 장관이다.
실향민의 삶과 애환은 속초시립박물관과 망향의 동산에 재현돼 있다.
판자, 깡통, 종이상자 잡동사니를 모아 지은 판잣집 생활상 등 실향민의 고단했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속초 곳곳에는 각기 고향과 사연이 다른 망향비와 망향동산이 자리 잡고 있다.
미시령 길목에는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어 한스럽고, 오려고 해도 올 수 없어 한스럽다'고 적힌 함경북도 길주 명천군 망향비가 실향민의 한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또 다른 외지로 떠났던 속초 실향민들은 매년 이즈음 '실향민문화축제'로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그 시절의 웃음과 눈물을 나눈다.
올해 9회째를 맞는 축제는 실향민과 그 후세대, 가족뿐 아니라 또 다른 실향민인 북한이탈주민과의 화합을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축제는 14일 엑스포 광장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3일간 아바이마을과 조도 인근 해상에서 합동 망향제, 함상위령제 등으로 열린다.
또 '뮤지컬 갈라콘서트 갯배'를 비롯해 실향민문화예술한마당, 추억의 변사극, 전국 이북·속초 사투리 경연대회, 전국 실향민 노래자랑, 이북·속초 실향민 놀이와 음식 체험 등이 다양하게 열린다.
이병선 속초시장은 12일 "축제를 통해 실향민의 애환을 달래고 1·2세대와 3·4세대 간 소통과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한다"며 "축제를 통해 화합은 물론 평화도 염원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h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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