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남발” vs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이사 주주 충실 의무를 둘러싼 갈등

문수빈 기자 2024. 6. 1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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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충실 의무 확대 도입 두고 토론회
이미 관련 규제 있어 도입 시 이중 규제라는 상장사
학계, 현행 제도로 해결 안 되는 게 문제라 지적
일단 학계 손 들어준 금감원… 세부 조율 필요할 듯
상법 개정 주체인 법무부도 큰 흐름에서 동의할 가능성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두고 이해 당사자들이 대립했다. 상장회사들은 이사 충실 의무는 현행 제도로도 충분하고 추가적인 규제안을 도입하면 기업의 경영 활동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학계와 투자자 측은 증시 상승의 발목을 후진적인 기업지배구조가 잡고 있는 만큼, 하루라도 빨리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금융감독원은 후자의 손을 들어줬다. 법의 한계로 주주의 이익이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어 이사의 충실 의무를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주주가 손해를 보더라도 이사가 주의 의무를 다했다면 손해배상책임은 물지 않게 하는 단서 조항을 달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단 이와 관련한 상법 개정은 법무부 소관이다. 법무부 또한 큰 흐름에서는 동의하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감독원이 후원한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세미나'가 12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렸다./문수빈 기자

12일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증권학회는 금감원 후원으로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정책 세미나를 열고 패널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의 주제는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의 적정성 여부’였다. 현재 상법상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은 회사로 한정돼 있는데, 이를 주주로 넓히는 게 적절한지 따져보자는 뜻이다.

이날 상장사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참석한 김춘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본부장은 지배주주의 지배권 남용을 제한하는 제도들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는 과도한 부담이라고 했다. 김 본부장은 “2011년 상법이 개정되면서 회사가 이사와 주요주주가 투자한 회사와 거래하면 그 내용과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는 조문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산이 2조원 이상인 상장사는 특수관계인과의 거래가 일정 수준 이상이면 주주총회에 보고를 해야 한다”며 “특히 지배주주가 지배하는 법인과 거래할 때는 이해상충으로, 규모에 관계없이 사업보고서에 기재해야 한다”고 했다. 지배주주가 일반주주의 이익을 외면하고 자신의 주머니만 챙기기 위해 일감을 몰아주는 현상을 막기 위해 이사의 충실 의무가 도입돼야 한다는 의견에 반박한 것이다.

김 본부장은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는) 주주 간 이익이 상충할 땐 이사가 의사결정은 하지 말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며 “이 탓에 소 제기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사상 손해뿐만 아니라 형사상 배임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배경에서다. 김 본부장은 “의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까지 확장하는 입법례는 해외에도 거의 없다”며 현재의 논의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진성훈 코스닥협회 연구정책그룹장도 여기에 동조했다. 진 그룹장은 “코스닥은 개인 투자자가 90%를 차지하는 특이한 시장”이라며 “이런 시장에 규제를 추가 도입하는 것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라고 했다. 규모가 작은 코스닥에 규제를 강화하는 건 과하다는 의미다.

일러스트=이은현

이 같은 상장사들의 의견에 김우진 서울대학교 교수는 “규제가 많다면 현재까지도 일감 몰아주기가 횡행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현재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으면 (어떤 결정을 해도) 면죄부로 인정이 되기 때문에 위 규제들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김중혁 고려대학교 교수도 재계의 우려가 과도하다고 봤다. 김중혁 교수는 “이사의 충실 의무는 일반적인 경영 이슈에 적용되는 게 아니다”라며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고 했다. 일상적인 경영활동인 신규 투자나 인수합병(M&A), 연구개발(R&D)이 아닌 지배주주에게만 유리한 합병 비율 적용, 지배주주나 그 특수관계자가 보유한 법인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등이 개정안의 대상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김중혁 교수는 “일반 투자자가 주식 보유로 본인이 부여받은 권익과, 이 권익이 어떻게 침해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자신의 부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알아야 한다”며 “(개정안으로) 상장사는 실무적인 차원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를 보완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 외의 방법(개정안 도입 반대)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주주 행동주의 펀드인 안다자산운용의 변준호 대표도 개정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변 대표는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를 한다”며 “지금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변호사는 “우리 법은 주주평등원칙을 말하고 있지만, 이를 위반했을 때 누가 어떤 책임을 지는지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며 “에버랜드 전환사채(CB)가 대표적인 예시”라고 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행동주의를 전개하는 주요 자산운용사가 회원으로 있는 포럼이다.

왼쪽부터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이부진 에버랜드 전무,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CB란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사채다. 천 변호사가 언급한 에버랜드 CB 사건이란 1996년 에버랜드가 발행한 CB를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사장이 매수한 뒤 주식으로 전환한 사건이다. 이 사장은 48억3090만원으로 에버랜드 주식 31.37%를 갖게 됐고,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그룹 승계 기반이 구축됐다. 법원은 에버랜드 CB가 기업 승계를 위해 헐값으로 발행됐다고 판단한 바 있다.

토론회에 참석한 금감원은 학계와 투자자 측의 걱정이 타당하다고 봤다. 정은정 금감원 법무실 국장은 “법원은 이사가 주주를 보호할 의무가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며 마찬가지로 에버랜드 CB 사건을 언급했다.

정 국장은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어긋난다는 상장협의 주장을 반박했다. 정 국장은 “충실 의무를 명시적으로 하진 않았어도 여러 국가가 판례와 연성 규범의 형태로 관련 내용을 갖추고 있다”며 “(충실 의무를 확대하는 게)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일부 재계의 우려를 인정했다. 정 국장은 “충실 의무가 확대되면 형사법적, 민사적 손해배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경영진의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그래서 경영판단원칙을 법제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경영판단원칙이란 이사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를 다했음에도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면 이사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법률적 판단 기준이다.

정 국장은 “일반 거래와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 자본 거래를 나눠서 충실 의무 적용을 달리하는 걸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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