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양극화, 냉전… 미 현대사의 얼룩을 관통하다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
치명적 약점 안고 사는 인물들
미국 인종차별 정면으로 응시
인간의 얼룩 담담하게 봤던 필립
아이러니한 트럼프의 대선 도전
미국 작가 필립 로스는 전미도서상과 전미비평가협회상을 각각 두번, 펜/포크너상을 유일하게 세번 수상했으며, 펜/나보코프상, 펜/솔 벨로상 등 미국 내 문학상을 휩쓴 작가다. 2001년 제정된 프란츠 카프카상의 첫회 수상자도 그였고 2011년에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기도 했다.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은 전쟁과 인종차별을 겪은 어느 미국인의 삶을 통해 미국의 얼룩진 역사를 묘사한 걸작이다.
![필립 로스는 인종차별·빈부격차·전쟁후유증·냉전적 사고 등으로 미국 현대사를 그려냈다.[사진=연합뉴스]](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6/12/thescoop1/20240612125126079mmdv.jpg)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의 불륜(일명 르윈스키 스캔들)으로 미국이 떠들썩했다. 미국 어느 대학에서 70대 후반의 콜먼 교수는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ㆍ로마 신화와 라틴어를 전공한 저명한 학자였다. 종신 교수로 임명된 콜먼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강의 내내 콜먼은 현란하고 해박한 지식으로 학생들을 압도했다. 콜먼은 계속 대학에 머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사소하고 치명적인 사건이 터진다. 콜먼은 개강한 날부터 몇주가 지나도록 계속 결석하는 두 학생의 이름을 출석부에서 발견하고 수업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농담하듯이 두 사람의 행방을 묻는다. "이 학생들은 왜 학교에 안 나오죠? 그들은 유령(Spooks)인가요?"
Spooks. 이 말 한마디로 콜먼의 경력은 끝장난다. 그가 언급한 'Spooks'라는 단어는 '검둥이(Nigger)'라는 노골적인 속어 대신 백인 학생들이 암암리에 흑인을 비하하는 데 쓰는 용어였다. 공교롭게도 장기 결석한 두 학생은 모두 흑인이었다.
콜먼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저명한 교수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소식은 곧 대학신문과 지역신문에 도배된다. 대학 당국은 여론에 밀려 콜먼을 파면한다. 콜먼의 아내마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둘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다. 콜먼은 산속의 별장에서 칩거한다. 홀로 남은 콜먼은 주기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네이선'이라는 작가와 대화를 나눈다.
미국 작가 필립 로스(1933~2018년)의 소설 「휴먼 스테인」의 도입부다. 소설은 대학에서 쫓겨난 콜먼이 젊은 작가인 네이선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시작한다. 콜먼에게 남은 유일한 낙은 새로운 애인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그의 애인은 콜먼이 근무하던 대학의 청소부인 30대 여성 '팔리아'였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을 보며 네이선은 질문을 던진다. "콜먼, 당신의 과거를 얘기해주세요."
미국 소도시의 가난하고 무지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콜먼에게 대학은 꿈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콜먼의 부모는 자식을 대학에 보낼 여유가 없었다. 콜먼은 운동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려고 권투를 시작했지만, 전국대회에서 탈락하고 만다.

대학 진학은 무산됐고 콜먼은 좌절한다. 그해 겨울,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전시 체제에 돌입한 미국 정부는 대규모 징집을 실시했다. 참전했다가 생환한 병사들에게 대학 등록금을 면제해준다는 소식을 들은 콜먼은 징병 절차가 진행 중인 체육관으로 뛰어간다.
여기서 그의 운명이 바뀐다. 콜먼은 신상카드를 기록하면서 인종 표시란에 '백인(W)'으로 체크한다. 콜먼은 흑인이었다. 그렇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피부가 검지 않았다. 서류를 정리하던 병무관은 피부가 그다지 검지 않은 콜먼을 보고 혼혈이라고 판단하고 도장을 찍어준다.
전쟁이 끝난 후 콜먼은 뉴욕의 대학에 진학했다. 군복무 서류에서 백인으로 인정받은 콜먼은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혈통을 감추고 살아간다. 명민한 콜먼은 대학에서 줄곧 최고 우등생이었고, 앞날을 보장받는다. 콜먼의 진실을 들은 네이선은 되묻는다.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오해받지도 않았을 테고 대학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대학 시절 콜먼은 덴마크 출신 여자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평생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콜먼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콜먼을 떠난다. 그 이후 콜먼은 자신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대학원을 마치고 교수가 돼서도, 아내와 결혼할 때도 그는 자신의 비밀을 숨겼다. 자식도 낳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야 진실을 털어놓은 콜먼을 보고 네이선은 탄식한다. "대체 팔리아는 어떻게 만난 겁니까?"
팔리아는 왜 70대 노인인 콜먼과 사랑에 빠졌는가. 의붓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가출한 팔리아는 도시에서 잡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팔리아의 남편 레스터는 운송업에 종사하는 성실한 노동자였다.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레스터는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그는 정글에서 죽어간 동료들의 악몽을 자주 꿨고, 그럴 때마다 아내 팔리아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집에 화재가 발생해 아이들마저 죽자 레스터의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팔리아는 남편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쳤고, 콜먼이 근무하는 대학에 청소부로 취직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두 사람은 삶의 벼랑에서 필사적으로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 네이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콜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팔리아와 함께 사망했다.
얼어붙은 호숫가에 앉아 두 사람을 애도하는 네이선에게 어느 낯선 남자(레스터)가 다가와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작가라고 답하자, 그 남자는 네이선에게 무엇에 대해 쓰고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네이선은 짧게 대꾸한다. "인간의 얼룩(Human Stain)."
어느 노교수의 불행한 삶을 다룬 이 소설을 표면적으로 읽으면 단지 희귀한 비극에 불과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콜먼의 삶은 미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알레고리다. 소설의 시작을 1998년으로 설정한 것이 유력한 단서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국정운영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던 클린턴 대통령의 위기를 콜먼의 비극과 교차시키면서 소설은 미국 현대사의 내밀한 상처―인종차별ㆍ빈부격차ㆍ전쟁후유증ㆍ냉전적 사고―를 파고든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에 도전하고 있다.[사진=뉴시스]](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6/12/thescoop1/20240612125128994tyxs.jpg)

콜먼의 비극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만약 콜먼이 인종차별을 겪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쟁이 없었다면 콜먼과 레스터, 팔리아의 삶은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지금 미국에는 트럼프를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필립 로스는 이런 사태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이미 그는 2004년에 소설 「미국을 노린 음모」에서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비행사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돼 극우주의 정책을 펼치는 가상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소설 속 린드버그의 모습은 트럼프와 거의 흡사하다.
필립 로스가 살아서 현재 트럼프의 재판과 대선 도전을 목도했다면 어떤 글을 남겼을까. 오점이 가득한 인간을 예리하게 응시했던 작가 필립 로스는 2018년 5월 22일 사망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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