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신생아가 세상을 흑백으로 보는 이유
최근 필자 주변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사람이 몇 명 있다. 노화로 수정체가 점차 탁해지며 어는 선을 넘어 한 전형적인 경우도 있고 갑자기 증세가 생겨(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한다) 받은 특이한 사례도 있다. 수술이라는 해결책이 없었다면 지금쯤 불편한 증상이 더 커졌거나 어쩌면 실명 상태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구촌에서 실명인 사람 4000만 명의 절반 이상이 백내장 때문이다. 많은 지역에서 여전히 백내장은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결국 실명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 가운데 치료가 안 되는 유형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수술할 돈이 없어서다.
● 실명 어린이, 인도에만 40만 명
파완 신하 미국 MIT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인도 출신으로 뉴델리에서 대학을 나온 뒤 미국으로 유학해 학위를 받고 교수로 눌러앉았다. 시각의 신경과학을 연구하고 있음에도 이런 사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생로병사라고 나이 들면 병이 생기고 이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 받는 것은 다들 구조적인 문제 아닌가.
그런데 2002년 초 고향 뉴델리를 방문했다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외출하는데 거지 가족이 다가와 구걸해서 동전을 던져 주다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 아들 두 명의 눈이 공허했다. 유심히 보니 소년들은 백내장으로 인한 실명이 분명했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형제로 보이는 두 소년 모두 백내장에 걸렸다니 이상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이 상황이 계속 머리에 남아 자료를 찾아봤다. 그 결과 인도에만 실명인 아이들이 무려 40만 명 가까이 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가운데는 소년들처럼 유전 질환인 선천성 백내장이 원인인 경우도 있었다. 수술을 받지 못해 평생 실명 상태로 살아야 하는 이들의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낀 산하 교수는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평소 신생아의 시각 발달 과정을 궁금해하던 산하 교수는 백내장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한 뒤 시지각이 발달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말 못 하는 아기들과는 달리 이들은 수술 뒤 시지각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고 시력을 테스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하 교수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연구비를 신청했는데 다행히 뽑혀 '프라카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프라카시(prakash)는 빛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다.
● 수술해도 시지각 불완전해
눈 검사를 통해 수술로 시력이 회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청소년을 선정한 뒤 탁한 수정체를 빼내고 인공수정체를 넣는 백내장 수술이 진행됐다. 신하 교수는 붕대를 풀고 처음 세상을 본 아이 또는 청년들의 시각 능력 획득 과정을 관찰했다. 그 결과 양극단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백내장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신생아 때 시각 발달 시기를 놓치면 시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한 극단과 적응에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정상 수준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이 다 틀렸다.
수술 직후 청소년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시각 정보에 혼란스러워했고 주위 사물을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가 추상화를 보는 것처럼 색의 덩어리가 흩어져 있을 뿐 사물 사이의 경계를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고정된 배경에서 순간 움직이는 물체는 식별할 수 있었다.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관찰한 결과 다행히 시지각이 서서히 나아졌고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두드러졌다. 그러나 정상 시지각 수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 딥러닝 소프트웨어로 증명
지난달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이런 현상이 관찰된 지 20여 년 만에 그 이유를 밝힌 논문이 실렸다. 역시 MIT 신하 교수팀이 인도 여러 기관과 함께 연구한 결과다. 이들은 백내장 수술을 받고 적응한 청소년들 고유의 시지각 패턴에 주목했다. 컬러 사진을 볼 때는 정상에 가깝지만 흑백 사진에서는 물체 식별 능력이 뚝 떨어졌다. 왜 그럴까.
갓 태어난 아기는 망막이 미성숙해 색 정보를 얻는 원추세포가 적어 색맹인 상태다. 따라서 반사되는 빛의 세기를 바탕으로 대상을 식별한다. 예를 들어 젖을 물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은 주위와 밝기가 다른 덩어리로 인식된다. 그 뒤 물체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서서히 색을 식별하면서 정상 시지각을 갖게 된다.
반면 백내장 수술을 받은 청소년은 수정체가 탁한 게 문제였지 신생아 시절 망막의 발달은 제대로 이뤄진 상태다. 따라서 시력이 회복되자마자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온전히 처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흑백 이미지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한다는 건 색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시지각이 왜곡됐다는 뜻이고 이는 신생아 같은 단계적인 시지각 발달 과정을 겪지 않아서 아닐까. 그렇다면 수술 직후에는 한동안 흑백 환경에 둔 뒤 서서히 색을 채운다면 시지각이 나아지지 않을까.
연구자들은 백내장 수술을 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이 가설을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비윤리적인 행위이고 만에 하나 결과가 더 나쁘다면 프로젝트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 그래서 대안으로 사람의 시신경을 모델로 개발한 딥러닝 콘볼루션(합성곱)신경망을 이용한 이미지 처리 소프트웨어를 대상으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연구자들은 소프트웨어의 딥러닝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눴다. 신생아 시지각 발달 과정을 재현하기 위해 먼저 흑백 이미지 데이터를 학습하게 한 뒤 나중에 컬러 이미지 데이터를 제공했다(gray-to-color. G2C).
백내장 수술을 받은 청소년 시지각 발달 과정 재현은 두 단계 모두 컬러 이미지를 학습한다(C2C). 한편 사람에서는 없는 상황인 두 단계 모두 흑백 이미지 학습(G2G)과 먼저 컬러 이미지 데이터를 주고 나중에 흑백 이미지를 학습하게 하는 경우(C2G)도 포함했다.
학습이 끝난 뒤 식별 능력을 평가한 결과는 사람과 같은 패턴을 보였다. 컬러 이미지로 평가했을 때는 G2C(신생아에 해당)와 C2C(백내장 수술 청소년에 해당)의 점수가 비슷했다. 사람에는 없는 G2G는 약간 낮았고 C2G는 결과가 형편없었다.
흑백 이미지로 평가했을 때는 흑백으로만 공부한 G2G가 가장 높았고 C2G와 G2C(신생아)가 뒤를 이었지만 차이는 적었다. 그런데 C2C(청소년)는 점수가 뚝 떨어졌다. 결국 신생아의 눈이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고 부실한 상태에서 서서히 완성되는 것은 시지각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한 진화의 결과인 셈이다.
연구자들은 이번 결과를 바탕으로 재활 프로그램을 만들어 백내장 수술을 받는 청소년에게 적용할 계획이다. 수술 직후에는 흑백의 방에 지내게 하는 식으로 색 정보를 억제해 반사되는 빛의 양에 따라 물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게 한 뒤 총천연색 세계를 접해 색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콘볼루션신경망을 이용한 소프트웨어도 이런 식으로 학습시키면 데이터를 양을 줄이면서도(초반은 흑백 이미지이므로) 더 나은 수행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인공지능(AI) 로봇에 적용하면 사람에 좀 더 가까운 시지각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의대 정원이 50%나 늘어나면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의대 진학을 위한 선행 학습 열기가 뜨겁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시각뿐 아니라 청각과 촉각 등 다른 감각은 물론 여러 인지능력이 단계적으로 발달한다. 아직 뇌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갖 정보를 쑤셔 넣어 뒤죽박죽을 만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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