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선생님’의 죽음[최현미의 시론]

2024. 6. 1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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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논설위원
의료 공백 4개월 갈등 새 국면
서울대 의대·개원의 휴진 선언
최대 피해자 환자는 다시 뒷전
한국사회에서 의사는 곧 영웅
존경받던 엘리트 의사의 몰락
환자의 ‘신발’ 바꿔 신어보길

한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제일 자주 등장하는 전문직 투톱은 검사(변호사)와 의사다. 법정 드라마와 메디컬 드라마라는 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다. 법정 드라마는 2010년대 초·중반부터 ‘정의’에 대한 사회적 열망과 함께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데 비해 메디컬 드라마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죽고 사는 휴먼 드라마적 요소 덕분에 역사가 더 깊다. 공식적으로 한국의 첫 메디컬 드라마는 배우 신구 주연의 1980년 KBS 드라마 ‘소망’으로, 동네병원 원장 닥터 리의 헌신적이고 감동적인 병상 일지가 주 내용이다. 그 후 30∼40편의 의학 드라마가 만들어졌는데 드라마 속 의사 주인공의 공통된 이미지는 ‘영웅’이다.

언론학 박사 김주미가 책 ‘메디컬 드라마’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K-드라마 속 의사는 영웅, 그중에서도 특별한 재능과 배경을 갖고 위기와 문제를 해결하며 환자를 구해내는 ‘슈퍼맨’이다. 이는 단지 드라마 속 허구 캐릭터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공유해온 의사에 대한 사회적 정의이자 사람들이 현실에서 만나고픈 의사의 모습, 즉 이상적인 대중의 판타지이다. 그래서 한나절 내내 기다리다 3분 진료를 받아도 의사에겐 온 국민이 기꺼이 ‘선생님’으로 부르며 존경을 바쳐 왔다.

이런 의사의 정체성과 이미지가 깨지고 있다. 2월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을 발표한 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시작된 의료 파행이 4개월이 돼가지만,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들이 17일부터 휴진을, 동네병원 중심의 대한의사협회(의협)는 18일 전면 휴진을 선언해 상황은 악화 일로다. 최대 피해자는 아픈 환자와 오늘이라도 당장 아플 수 있는 예비 환자들인 모든 국민인데, 의사들은 이들을 향한 눈을 감았다.

물론 현 사태는 정부가 충분한 사회적 협의나 여건 마련 없이 의대 2000명 증원을 밀어붙이면서 촉발됐다. 반발한 전공의가 집단 이탈하자 전문의 배출에 문제가 생겼고, 의대생의 집단 수업 거부로 내년엔 유급된 학생들과 신입생이 합해져 7000여 명이 함께 수업하게 됐다. 이는 다시 의대 증원의 반대 이유가 됐다. 전공의 근무 여건 개선, 필수의료 및 건강보험 수가 조정 등 해결해야 할 문제도 산적하다.

하지만 여기엔 의사들의 배타적 이기주의도 자리하고 있다. 의료 파행의 키를 쥔 전공의들은 2025년 대입 전형이 이미 발표된 상황에서 의대 증원을 포함해 의료개혁 완전 백지화를 주장할 뿐, 한 번도 자신들 입장을 국민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들은 제자인 전공의들에 대한 행정처분 완전 취소를 요구하며 휴진을 예고했다. 또 의협의 전면 휴진 배경에는 비급여 진료 항목 통제, 진료지원 간호사 도입 등 의사 기득권을 줄이는 의료개혁에 대한 반발도 있다.

이들 의사 모습에 “현대 엘리트는 더 이상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배타적인 계급”이라는 독일 사회학자 미하엘 하르트만의 선언이 겹쳐 떠오른다. 하르트만은 ‘엘리트 제국의 몰락’에서 많은 엘리트가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자기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대중의 고충은 이해하지 못하고 배타적 이익에 집중한다고 했다. 이는 극단적 갈등을 부르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같은 맥락에서 읽히는 ‘의사 엘리트’의 몰락은 시대와 세대 변화에 따라 의사가 존경받는 슈퍼맨에서 제 이익을 따지는 직업인이 되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 계급의 소멸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안타깝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사태 해결은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일본 출신 작가 브래디 미카코가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에서 말하는 공감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극단적 갈등 속에서 늘 두 가지 공감, 즉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에 대한 심퍼시(sympathy)와 견해가 다른 사람의 상황을 상상하는 엠퍼시(empathy)가 작동한다고 했다. 그중 ‘친구’에 대한 심퍼시는 ‘친구의 적은 나의 적’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타인에 대한 엠퍼시를 방해한다. 해결책은 엠퍼시, 즉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이다. 그래서 하늘 위 슈퍼맨이든 땅 위의 직업인이든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를 꺼내 본다. 의사 선생님, 제발 환자들의 신발을 신어봐 주세요.

최현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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