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천천히 서두름` 원칙 되새길때"…한은 74주년 기념사[전문]
"고물가·고금리로 경제주체가 고통이 크다는 것 알고 있지만, 물가가 제대로 안정되지 않으면 취약계층의 어려움은 가중될 것이다." "너무 늦게 정책기조를 전환할 경우 시장불안 초래할 수 있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천천히 서두름' 원칙을 되새겨볼 때다"
한국은행이 12일 창립 74주년을 맞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2일 기념사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다음은 이 총재의 기념사 전문
한국은행 임직원 여러분!
오늘은 한국은행의 창립 74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지금의 한국은행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선배님들, 어려운 환경에서도 각자 맡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한국은행을 응원하고 격려해주시는 많은 분들, 특히 가족 여러분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제가 한국은행에 온 지 2년이 지나 임기 후반에 맞는 첫 창립기념일이기에 개인적으로 더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지난 2년간을 뒤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해 더 이야기하려 합니다. 당면한 현안과제가 중차대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지난 2년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통화정책 여건을 살펴보면, 지난 1/4분기 GDP성장률이 예상을 상회하는 등 우리 경제의 회복세가 당초 우려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여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지표 뒤에는 수출과 내수의 회복세 차이가 완연하고 내수 부문별로도 체감 온도가 상이합니다. 물가상승률도 둔화 흐름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예상보다 양호한 성장세, 주요국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에 따른 환율 변동성 확대 등으로 물가의 상방 위험이 커진 데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고물가‧고금리로 인해 여러 경제주체가 겪고 있는 고통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가가 제대로 안정되지 않으면 실질소득의 감소, 높은 생활물가 등으로 취약계층의 어려움은 가중될 것입니다. 또한 섣부른 완화기조로의 선회 이후 인플레이션이 재차 불안해져 다시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 감수해야 할 정책비용은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따라서 물가가 목표 수준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현재의 통화긴축 기조를 충분히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너무 늦게 정책기조를 전환할 경우 내수 회복세 약화와 더불어 연체율 상승세 지속 등으로 인한 시장불안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일찍 정책기조를 전환할 경우에는 물가상승률의 둔화 속도가 늦어지고 환율변동성과 가계부채 증가세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마지막 구간에 접어든 지금, 이러한 상충관계를 고려한 섬세하고 균형 있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 통화정책국이 작성한 블로그에서도 강조되었듯이,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정책 결정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천천히 서두름(Festina Lente)'의 원칙을 되새겨볼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기준금리를 빅스텝으로 인상하던 때의 거친 풍랑은 이제 어느 정도 잦아든 듯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면 아래 곳곳의 보이지 않는 암초를 피해 항로를 더욱 미세하게 조정해 나가야 하는 또 다른 어려움을 마주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국가별로 정책운영 성과가 차별화되어 나타나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실력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경제예측의 정확성을 높이고 다양한 시나리오별 리스크를 종합적으로 점검하면서 정교하게 정책을 운용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통화정책의 성공적 수행 외에도 한국은행이 앞으로 마무리해야 할 사업이 많습니다. 우선 계획했던 대로 8월부터 반기에서 분기 단위로 세분화된 경제전망을 발표하여 분석능력을 제고하고 시장과의 소통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둘째, 현재 금통위원의 향후 3개월 내 기준금리 전망에 대한 견해를 공개하고 있는데, 위원님들과 함께 이러한 방식의 효과 및 장단점 등에 대해 검토하고 개선방안을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셋째, 단기금융시장에서 거래량이 현저히 줄어들어 더 이상 지표금리로서 대표성이 없음에도 여전히 CD금리가 관행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대신해 실거래 기반의 무위험지표금리(KOFR)를 준거로 하는 금융상품 거래를 장려하여 통화정책 파급경로의 유효성을 제고하고 관련 파생상품시장의 활성화에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넷째,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이후 유동성 안전판 강화를 위해 한국은행 대출 적격담보 범위를 대출채권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한 바 있습니다. 은행 및 비은행예금취급기관에 대한 체계적이고 예측가능한 유동성 지원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노력을 지속해 나가야 합니다. 필요시에는 유관기관과의 협의하에 한은법을 개정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속화되고 있는 디지털 전환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먼저 기관용 CBDC,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예금토큰 등 다양한 민간 디지털 통화가 발행·유통되는 새로운 미래 금융인프라를 시범 구축하기 위해 CBDC 활용성 테스트를 추진하겠습니다. 아울러 BIS 및 7개국 중앙은행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글로벌 금융인프라 연구 프로젝트(Project Agora)에 적극 참여할 계획입니다. 비기축통화국으로서 국가 간 지급결제 시스템의 새로운 표준을 설정하는 작업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초기 설계자(rule-setter)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 공공‧금융기관의 업무망이 인터넷망과 분리되어 있어 클라우드, AI 등 새로운 IT 기술을 활용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한국은행은 국가정보원,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등 유관기관과 협의하여 공공분야 망보안 정책 개선의 첫 시범기관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언제 어디서나 제약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국은행의 IT 효율성과 업무 생산성이 향상되고 사이버 보안(cyber security)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또한 제고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임직원 여러분!
조금 더 멀리 바라보자면 한국은행이 해야 할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저출생·고령화, 지역불균형과 수도권 집중, 연금고갈과 노인빈곤, 교육문제, 소득·자산불평등, 노동시장 이중구조 등 그간 누증되고 심화되어 온 여러 구조적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연구영역을 통화정책의 테두리 안에만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하더라도 높은 물가수준은 계속해서 생계비 부담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이는 통화정책만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주요국 대비 높은 의식주 비용을 낮추기 위해 공급채널을 다양화하고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등 근본적 해결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저출생·고령화 문제가 지역불균형 및 수도권 집중 문제와의 악순환을 통해 우리의 성장잠재력을 훼손해온 지 오래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가계부채 또한 향후 금융안정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관리해야 합니다. 최근 국민계정 기준년 개편으로 명목 GDP가 상향 수정됨에 따라 부채 비율이 낮아졌습니다만 여전히 우리 경제의 위험요인임에 변함이 없는 만큼 하향 안정화를 위해 계속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혁신 등에 따른 사회 대전환을 앞두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러한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 노력 없이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은행이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구조개혁과 관련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정부 및 유관기관과 긴밀히 소통하며 우리나라 최고의 싱크탱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착화된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는 집단별 이해관계가 첨예하여 서로 대립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법적 권한이 없는 한국은행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권한이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한국은행이 더 중립적으로 분석하고 장기적 시각에서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책임감으로 구조개혁 과제에 대해 제언하는 역할을 계속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정책제안도 이를 뒷받침하는 실력이 없다면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은행의 정책 메시지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보고서의 퀄리티quality에 대한 외부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며, 이는 우리의 전문성 제고와 역량 강화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은행 가족 여러분!
그간 우리는 중앙은행에 대한 국민들의 높아져 가는 기대에 부응하고 내부적으로 건전한 조직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경영인사 혁신조치 등 여러 변화를 시도해왔습니다. 그 결과로 최근 대내외 곳곳에서 발전적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으로는 정보공유와 토론문화가 확산되고 있고 밖으로는 당행이 제시한 정책 화두가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블로그, SNS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한 정책 커뮤니케이션 또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변화의 모멘텀이 조직문화로 깊이 자리잡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공감대 위에 수평적 조직문화 확산과 직원 여러분의 주인의식에서 출발한 자발적 참여가 필요합니다. 한국은행이라는 큰 배의 목적지는 조직이 제시할 수 있지만 실제 키를 잡고 항로를 나아가는 주체는 직원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상사의 지시가 아니라 아래서부터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부서 간 협업과 TF 구성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구현해 나가는 문화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얻어진 개인의 성과물은 외부에 자유롭게 공개되어 각자의 이름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경제연구원 보고서에서 기업혁신의 주체로 주목한 '똑똑한 이단아'는 한국은행에도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 직원들이 때로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똑똑한 이단아'가 되어 한국은행의 혁신을 이끌어주길 바라며, 이를 장려하는 조직문화가 확산되어 나가길 희망합니다. 그동안 추진해온 일련의 조치들이 기대했던 결실로 맺어질 수 있도록 서로가 믿음을 갖고 지금 내딛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임직원 여러분!
제 집무실 책상 위에는 "누가 보상(credit)을 받을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라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격언 팻말이 놓여있습니다. 누가 보상을 받을지 따지기보다 모두가 성과를 공유한다는 마음으로 부서 간 칸막이를 걷어내고 힘을 합칠 때 한국은행의 실력은 배(倍)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의 책임을 너무 걱정하지 않는다면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논쟁과 비난을 두려워하며 피하기만 한다면 늘 그 자리에 머물 뿐 발전적 변화는 요원할 것입니다. 고장나 멈춰선 시계가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하여 이를 안정적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은행이 '한은사'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한은'으로 거듭나도록 하자는 것이 제가 취임 때부터 밝혔던 포부이고, 그 길을 향해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의 길, 그리고 가보지 않았던 길이 그저 편안하게만 느껴질 리 없을 것입니다. 잘못된 길이 아니냐는 웅성거림이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길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다시 과거의 길로 되돌아갈지는 결국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국은행은 지식의 소비자나 중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각 분야의 프론티어에서 지식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나가야 하며, 이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과 논란은 실력으로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창립 74주년을 맞이하여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간 한국은행이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민원응대, 시설운영, 화폐정사, 안전관리, 경영지원 등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각자의 소임에 최선을 다해주신 여러분의 헌신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청결한 업무환경을 위해 애써주시는 미화원 여러분, 직원자녀의 편안한 보육환경을 위해 힘써주시는 어린이집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역본부와 타국 멀리에서 한국은행의 앰배서더로 활약하고 있는 직원분들께도 고마운 마음과 응원을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늘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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