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화폐는 은행예금을 대체할 수 있을까
십여년 전 금융 혁신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던 핀테크가 내세운 기치 중의 하나는 은행 기능의 ‘언번들링’이었다. 이는 은행의 여러가지 기능을 각 분야에 특화된 핀테크 업체가 분할하여 담당함으로써 은행보다 우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명이었다. 나아가 기존 은행들이 ‘해체’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예컨대 은행의 수신 및 그와 결합된 지급 기능은 보다 사용자 친화적인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테크업체가 담당할 수 있으며, 여신 기능은 피투피 대출 같은 전문업체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보다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은행이 대출을 통해 예금을 창조함으로써 민간화폐 대부분을 공급하는 현재의 통화시스템을 떠올린다면, 이런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은행의 핵심 기능은 예금과 대출, 혹은 수신과 여신이라는 두 기능의 결합을 통해 민간화폐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다. 만약 은행의 수신과 여신 기능이 ‘언번들링’되면, 은행의 화폐 창조 기능은 사라지게 된다. 은행 기능의 ‘언번들링’을 내세운 핀테크업계 주장은 은행의 화폐 창조 기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해프닝에 가깝다.
■ 은행의 화폐창조, 수신과 여신은 한묶음
은행은 대출자산을 보유하면서 그에 대응하는 부채로 예금을 만들어낸다. 은행의 채무증서로서의 예금은 보유자의 요구에 즉각 대응하여 상환한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사실상 만기 없는 초단기부채다. 덕분에 예금은 상품과 서비스의 구매, 이체와 송금 등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은행의 수신 기능이란 금전의 수탁 기능을 지칭하기보다는, 자신의 채무증서를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지급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채 측면의 특성만으로 은행이 화폐의 창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은행 부채의 특성은 은행이 화폐를 창조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은행이 화폐를 창조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은행의 자산이 화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은행의 자산이 화폐라면, 즉 은행이 현금을 보유하면서 그 금액에 상응하는 예금화폐를 발행한다면, 이는 은행이 화폐와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 뿐,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화폐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 경우 은행은 화폐량을 늘린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현금화폐를 기반으로 그 현금을 보다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여기서 화폐 창조는 현금을 만든 중앙은행의 역할이다.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었다고 하려면, 투입과 산출이 달라야 한다. 만약 연금술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금이 아닌 다른 금속을 재료로 금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금 1그램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1그램의 금이 필요하다면 이는 금을 ‘창조’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화폐도 마찬가지다. 은행이 현금자산을 담보로 그에 상응하는 예금화폐를 만들었다면, 현금이 예금으로 바뀌었을 뿐 새롭게 추가된 화폐는 없는 셈이다. 따라서 은행이 화폐를 ‘창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행이 화폐가 아닌 다른 자산, 즉 대출자산을 담보로 예금화폐를 발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출을 통해 예금화폐를 만든다는 명제의 의미이며, 여신과 수신의 ‘번들링’이 은행의 핵심 기능인 이유다.
요컨대 단기부채와 장기자산의 결합, 즉 ‘만기변환’은 은행의 화폐창조 기능을 지칭한다. 이는 중앙은행의 ‘본원통화’를 기반으로 예금이라는 ‘파생통화’가 만들어진다는 전통적 시각과 구별된다. 대출을 통한 화폐 창조의 고유한 장점, 즉 시장의 화폐수요 변화에 대한 탄력적 대응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지난 기고문(2023년 8월23일치 18면)에서 강조한 바 있다.
■ 전자화폐의 성격… 준비자산 운용방식에 따라 달라져
한때 ‘은행의 미래’를 참칭했던 피투피 대출업은 이제 온라인 대부업으로 자리잡거나 은행 면허를 취득하며 전통적 은행업으로 변신했지만, 최근 디지털화의 진전과 빅테크의 출현, 토큰화 기술과 다양한 전자지급수단들이 등장하면서 또다시 새로운 전망들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 핀테크의 등장이 전통적인 은행의 해체 또는 변화를 전제로 금융 혁신을 강조했다면, 최근의 새로운 조류들은 화폐의 변화와 혁신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 새로운 화폐들은 무엇이 얼마나 새로울까?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전자화폐(e-money) 또는 스테이블코인 등의 전자지급수단들이다.
비트코인 등의 일부 암호화폐와 달리, 전자화폐로 통칭되는 대부분의 지급수단들은 모두 발행자의 부채라는 점에서 은행화폐와 유사하다. 그러나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자신의 단기부채가 보편적 지급수단으로 사용된다고 해서 화폐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부채의 특성뿐만 아니라 그 부채에 대응하는 자산이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만약 전자화폐의 발행자들이 준비자산을 은행처럼 대출로 운용한다면, 이들은 정의상 은행이다. 분산원장을 사용하든 중앙원장을 사용하든 간에 이들의 경제적 실질은 은행과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규제와 감독, 안전장치들도 은행에 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은행 전산시스템이 기반하는 기술의 특성에 따라 은행의 실질적 기능이 달라지거나 규제가 차별화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국가에서 스테이블코인 등의 발행업자를 사실상 은행으로 한정하는 규제방안을 추진중인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전자화폐의 준비자산이 ‘타인의 화폐’로 구성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타인의 화폐’는 타인이 발행한 화폐, 즉 해당 전자화폐 발행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발행한 화폐를 지칭한다. 주요국의 전자화폐 규제방안들을 보면, 준비자산 전액을 은행예금으로 예치하도록 하는 사례가 있는데, 은행예금이 바로 타인의 화폐다. 여기서 전자화폐 발행자는 화폐를 창조하지 않는다. 전자화폐 발행업자는 세상에 없던 화폐를 새로 만들어 그만큼의 화폐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전자화폐는 거래의 편의성을 제고할 수 있지만, 은행예금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기존 예금화폐의 사용환경을 개선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조에서 대출을 통해 예금을 만들어내는 은행의 고유한 화폐창조 기능은 그대로 유지된다. 신용카드나 체크카드의 성장으로 인해 은행의 고유한 기능이 달라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방식과 조금 다르게, 전자화폐의 준비자산을 구성하는 ‘타인의 화폐’가 민간은행의 예금화폐가 아니라 중앙은행의 화폐일 수도 있다. 전자화폐의 발행자에게 준비자산 전액을 중앙은행에 예치하도록 의무화하는 규제가 그것이다. 예컨대 영국은 발행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전자화폐를 대상으로 준비자산 전액의 중앙은행 예치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앞의 사례와 비교하면, 은행예금이 중앙은행 준비금으로 바뀌었을 뿐, 기본 구조는 유사하다. 전자화폐 발행자는 화폐를 창조하지 않으며, 전자화폐는 중앙은행 화폐의 사용 편의성을 제고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전자화폐 발행자는 사실상 내로뱅크가 되며, 그 실질적 기능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소매 씨비디씨의 대행업무가 된다.
요컨대 전자화폐가 새로운 화폐의 등장을 의미한다면, 그 새로움은 준비자산에 대한 규제방식에 달려 있다. 전자화폐의 준비자산이 타인의 화폐로 구성된다면, 전자화폐 발행자는 화폐 창조자가 아니며, 이들이 제공하는 전자화폐의 발행량은 은행예금 또는 중앙은행 화폐의 총량에 의해 제한된다. 이와 달리 만약 전자화폐 발행자의 준비자산에 은행과 유사한 대출 운용을 허용한다면 전자화폐 발행자는 말 그대로 은행이다.
또한 전자화폐의 준비자산 규제 방식은 전통적인 은행 규제와도 관련된다. 위에서는 극단적인 규제방안을 예로 들었지만, 중간적인 형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준비자산의 절반은 현금 보유를 의무화하되, 나머지 절반은 대출 등으로 운용하도록 허용하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화폐 창조 기능은 절반으로 약화될 것이다. 은행에 대한 유동성 규제가 바로 이런 사례다. 물론 은행자산의 절반보다는 크게 낮지만, 유동성 부족에 대비하여 자산의 일부를 고유동성 단기자산으로 보유하라는 것이 유동성 규제다. 은행의 유동성 위험이 자산과 부채의 만기불일치에서 기인하므로, 그에 대비하여 만기불일치를 다소 축소하라는 요구인 셈이다. 그런데 만기불일치 덕분에 은행의 화폐 창조가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하면, 만기불일치를 축소하라는 규제는 화폐를 조금 덜 창조하라는 규제가 된다. 자본규제 역시 대출시 전적으로 신규화폐 창조에 의존하지 말고, 기존 화폐도 조금 활용하라는 규제라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룬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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