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5년, 박한별의 진짜 이야기

서울문화사 2024. 6. 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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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사라진 건 자의는 아니었다. 시선과 분위기가 그녀를 움츠리게 했다. 5년간 숨 고르기를 마치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박한별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봤다.

배우 박한별을 향한 대중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고, 추측을 쏟아낸다. 분명한 건 온라인을 장식했던 수많은 기사 중 박한별 본인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했던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남편과 관련된 논란 속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억울하다’거나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묵묵히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5년 뒤 <우먼센스>와 마주했다.

주변에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하라’고 했지만
그때의 저는 나서서 정정할 기력도 없었어요.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죽어야 끝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어요.
매일 울었고, 많이 지쳐 있었죠.

“죽어야 끝나는구나…”

박한별은 숨기지 않았다. 모든 질문에 정성껏 대답했다. 애둘러 표현하지도 않았다. 정공법. 그녀가 선택한 방법이다.

“억울한 마음… 왜 없었겠어요?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밉기도 했죠. 물론 사실인 것도 있지만,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더 많았어요. 주변에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하라’고 했지만 그때의 저는 나서서 정정할 기력도 없었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박한별의 남편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승리 사건’에 연루됐다. 꽤 오랜 법적 다툼 끝에 법원의 판결은 집행유예. 법원은 남편의 진정성을 믿었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

“그 당시에는 ‘죽어야 끝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매일 울었고, 많이 지쳐 있었어요.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박한별은 안다. 아프고, 무너지고, 다치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진 굳은살은 어떠한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을 단단한 내공이 됐다는 걸. 지금의 그녀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자유롭게 흔들리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제 모습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 저는 모든 일에 감사하고, 만족하거든요. 남편도 평생을 저에게 봉사하면서 살겠대요. 아이들한테도 정말 잘하거든요.”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에 대한 믿음이었다. 남편은 사건 직후 가장 먼저 박한별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고 한다.

“제게 ‘속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와 남편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 말일 뿐이에요. 남편은 지금까지 저를 단 한 번도 불안하게 하지 않았어요. 숨김없이 모든 걸 다 말해주었고, 제가 힘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들을 함께 고민했죠. 그 모든 걸 행동으로 보여주었어요. 사람들이 아무리 욕한다고 해도 제가 아는 남편은 적어도 ‘개차반’은 아닙니다.”

오래 알고 지냈던 친구와 1년 연애 끝에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우정으로 다져진 끈끈한 부부다. 방송에 복귀한다고 했을 때도 남편은 적극적이었다. 자기 때문에 아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때 저희는 ‘같이 죽자’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이라도 젊을 때 시련이 와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어요. 50대, 60대에 그런 일을 겪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 같거든요. 정신 차리고 살라며 호되게 혼난 기분입니다. 너무 힘든 기억은 뇌에서 스스로 지워버린다고 하잖아요. 저희가 그래요. 다 잊고 새로 시작하려고 그런가 봐요.”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박한별은 사건 직후 제주도로 떠났다. 서울살이를 모두 정리했다. 맺었던 인연이 자연스럽게 정리됐고, 새 사람으로 인생을 채워갔다.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 마음이 안정되자 몸과 마음의 건강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주도 생활이 너무 좋아요. 사람에 따라 잘 맞는 사람도 있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되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자연이 좋고, 스포츠가 좋죠. 문만 열고 나가면 사계절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자연이 펼쳐져 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기도 너무 좋죠. 서울에서는 이유 없이 매일 바빴던 것 같은데, 제주도에선 적어도 여유가 있어요.”

제주도 이야기를 하니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현재 카페를 운영 중이다.

“지금 제주도에서 카페를 하고 있어요. 벌써 5년이 됐네요. 고등학생 때 데뷔해 방송 활동만 했던 제가 뭘 알겠습니까. 좌충우돌 우당탕탕의 결정체였죠. 카페를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관계가 어려웠습니다. 힘들기도 했지만 배우는 것도 많았어요.”

어쩌면 이 모든 게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우연한 기회였고,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를 떠나 뭔가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그 시간이 힘들었어요. 내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들이 괴로웠죠. 선택받아오던 사람이 선택받지 못하는 상황, 모두가 나를 피하는 상황,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지는 상황… 아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그리고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보고도 싶었어요. 그동안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잖아요. 카페에 오가는 사람들과 한마디씩만 나눠도 굉장히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는 막연한 로망 같은 게 있었어요. 마지막으로는 다시 활동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컸습니다. ‘내가 연기를 다시 할 수 있을까?’, ‘다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뭐라도 해야겠더라고요. 그 시기에 만난 게 커피였고, 자연스럽게 카페를 창업하게 됐죠.”

박한별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밝게 웃지만 그 웃음 너머엔 아픔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저더러 ‘도피한 거 아니냐’고 말해요. 도피하려고 했다면 제주도가 아닌 해외로 갔겠죠. 정말 사라지려고 했다면 카페를 열지는 않았을 거예요. 저는 그저 제 삶을 산 것뿐이에요. 아이도 둘이나 낳았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보여줘야 하잖아요. 언제까지나 숨어 지낼 수는 없었어요.”

잘나가던 과거가 그립지 않아요

요즘 박한별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다. 아침에 두 아이를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밀린 살림을 시작한다. 정신없이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이들이 돌아온다. 밤 10시, 전쟁 같은 육아를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된다. 시원한 맥주와 넷플릭스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낙이 돼준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전혀 여유롭지 않아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모두 공감할 거예요. 하루가 너무 짧죠. 아이가 집에 없는 사이에 부지런히 운동도 하고 뭘 배우러 다니기도 해요. 심심하다 싶으면 일을 벌여요. 주변에선 왜 그렇게 바쁘게 지내냐고 묻는데, 사실 육아만 하기에도 바쁘고 정신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일부러 더 바쁘게 지내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 일상에 몰입해야 하는 엄마이기에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이 크면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되겠죠. 그러면 아빠와 엄마의 이야기도 접하게 될 거예요. 피할 수 없을 테고, 어쨌든 상처를 받게 될 텐데… 그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도 비슷한 생각을 하더라고요. 적어도 엄마, 아빠가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보여주고 싶어요. 의도하지 않게 힘든 일이 생겨도 이겨내고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래서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 해요. 남들이 제 인생을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들의 말과 행동에 연연하면서 저를 괴롭히고 싶지 않거든요.”

박한별이 바라는 궁극적인 가정은 ‘행복한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집’이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 결혼 후 출산 역시 미루지 않았다. 예쁜 가정을 꾸리는 것만큼 훌륭한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계획 임신이었어요. 육아는 너무 힘들지만 그 힘듦 속에서 오는 행복감이 분명히 있거든요. 제가 외동딸인데, 힘든 일을 겪어보니까 더욱 알겠더라고요. 나를 지켜주는 건 그 누구도 아닌 가족뿐이라는 사실을요. 아들에게도 평생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박한별은 긍정의 전염성을 믿는다. 그래서 더 환하게 웃는다.

“내가 온전해야 아이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어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많이 웃어주려고 노력해요. 종종 요가를 하러 가는데, 그 이유도 결국 아이들을 위한 거더라고요. 저만을 위한 시간을 통해 힐링하고 와야만 육아에 전념할 수 있고, 짜증 내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잠시 숨을 고른 박한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행복 지수를 설명하자고 하면 사실 그때그때 다른 것 같아요. 일할 때, 집에 있을 때, 아이들과 함께할 때 행복감이 모두 다르죠. 현재는 제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한창 인기가 많았을 때 또는 데뷔했을 때, 돈을 가장 많이 벌었을 때가 별로 그립지 않아요.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단단하게 여문 지금의 제 모습이 좋거든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해보자”

박한별은 최근 새 소속사에 둥지를 틀었다. 화장품 모델에 발탁되면서 세간의 우려 섞인 시선을 깨뜨렸다. 드라마 출연을 검토 중이고, 몇 개의 영화 시나리오도 받았다.

“타성에 젖어 일한 철없던 시절의 박한별과 엄마가 되고 난 후의 박한별은 완전히 달라요. 아이를 싫어했던 제가 두 아이를 키우고 있고, 인생을 몰랐던 제가 이제야 조금 인생을 알게 됐습니다.”

몰랐던 ‘세상’을 경험한 그녀. 연기자로서도 분명 성장할 것이다.

“다시 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다시 연기할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래서 마음을 접고 지냈죠. 자신이 없었어요. 솔직히 누가 저를 선택해주겠어요. 그러다가 지난해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더 해보자’라고요.”

연기하는 자신을 상상하니 활력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지금의 소속사를 만났고,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다. 사람들과의 소통도 시작했다.

“육아도 처음, 살림도 처음, 창업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던 상황이었어요. 번아웃이 왔었죠. 그런데 비슷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랄까요. 꽉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어요.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정말 용기를 내보려고요.”

그렇게 박한별은 공부를 시작했다. 5년 사이에 바뀐 매체 환경과 플랫폼 등에 대해 하나씩 알아갔다. 그렇게 처음 도전한 것이 유튜브였다. 그녀는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공유했고, 최근에는 구독자 10만 명을 달성했다. 자축하는 의미에서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 전액을 사회에 환원했다.

“모든 게 다 감사한 요즘입니다. 남편의 사건 이후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업계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장면이 제게는 소중하거든요. 저를 선택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무엇보다 이제부터라도 진짜 저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기획 : 하은정 기자 | 취재 : 이예지(프리랜서) | 사진 : 이대원 | 스타일링 : 최정임 | 헤어 : 졸리원장(Olly hair&makeup) | 메이크업 : 한빛쌤(Olly hair&make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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