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언론이 북한 보도에 진심인 이유

한겨레 2024. 6. 1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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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일간지 ‘더 선’ 누리집 갈무리.
서수민 교수

서수민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영국에서 지나가는 할머니를 붙잡고 “두 유 노 노스코리안 프린세스?”라고 물으면 바로 “주애!”라는 정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영국 언론의 북한 보도량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더 선’ ‘데일리메일’ 같은 타블로이드 신문의 북한 보도는 한국 언론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더 선에서 ‘김정은’을 검색하면 2400개 넘는 기사가 나온다.

미국이나 일본보다 북한 관련 현안이 훨씬 적은 영국이 왜 이렇게 북한 보도를 많이 할까? 그 이유가 궁금해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영국 주요신문(타블로이드 3개, 정론지 3개) 6개 매체의 북한 관련 보도를 전수 분석해봤다.

일단 눈에 띈 것은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이끄는 보도의 연성화와 폭발적인 보도량 증가다. 북한이 잇따라 서방 국가들과 수교를 맺고 각종 교류 문화 행사에도 적극적이던 2000년대 초반에도 관련 기사가 거의 없던 대중지들의 보도량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급증했다. 이들은 핵무기나 미사일 등 전통적인 외교, 안보 기사보다 스포츠와 영화, 외국인 억류 등 다양한 주제로 지면을 구성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

전반적으로 보도는 부정적이고 인종주의적이었다. “기이한” “엽기적인” “미친” “이상한”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며 북한의 비정상성을 부각했다. 과장 보도와 풍자 등 타블로이드 언론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김정은 국무위원장 외모에 대한 조롱이 지나쳤다.

정론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도좌파 권위지 ‘가디언’도 “세계에서 가장 키가 작은 지도자는 누구일까?”라는 제목의 기사 첫 문단에서 김정은의 키가 162㎝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키가 작고 뚱뚱해 매력 없는’ 동양 남성에 대한 편견이 드러난 낚시성 기사다. 기저에는 ‘북한은 어차피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국가인데다 정정 보도도 요청하지 않을테니 조회수라도 올려보자’는 안보상업주의적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보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스포츠와 경제, 젠더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북한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 심지어 애정까지 담긴 기사가 눈에 띄었다. “발에서 피가 나더라도 온몸을 던져 그라운드를 뛰는 북한 축구팀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월드컵 관련 기사(2009년), “김정은은 대외적으로는 숙청과 핵 위기 자극 발언을 하며 긴장감을 높이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서민과 중산층을 겨냥한 주택 등 편의시설 건설에 앞장서고 있다”는 기사(2015년) 등이 대표적이다.

영국이 북한 보도에 집착하는 데에는 왕족 보도에 익숙한 이들의 눈에 북한이 ‘세습 왕조’로 비치는 점도 작용했다. 또 아리랑 매스게임 같은 스펙터클, 냉전 향수를 자아내는 사회주의 국가의 이미지 역시 영국인들이 눈을 떼지 못한 이유로 꼽힌다. 이유야 어쨌든 북한 보도의 폭과 깊이 모두 확장되는 양질 전환이 이뤄졌고, 결과적으로 북한 관련 보도는 영국 국제 보도의 ‘주류’로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한국 언론의 북한 보도는 어떤가. ‘연합뉴스’ 등 3대 공적 매체를 제외하면 북한 뉴스를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 취재 경험이 있고, 북한 자료의 행간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극소수의 전문기자들마저 후임자 없이 은퇴하고 있다. 독자와 시청자들이 북한 뉴스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다. 한 북한 전문기자는 “북한에 대한 적대성이 언론의 객관성을 해치고, 그러다 보니 북한을 더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20년 전, 우리에게도 버스를 타고 개성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서 취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그곳에서 쓴 기사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이를 통해 맺었던 관계였다. 공식 행사가 끝나 헤어질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까 아쉬워 어찌할 줄 몰랐던 기억들. 이런 기억은 과거일 뿐, 영국 언론보다도 북한에 관심이 없는 것이 한국 언론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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