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헌신 바라기엔 너무도 가혹한 법원

조백건 기자 2024. 6. 12.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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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에 구토 치료제 처방한 의사
법원 “파킨슨병 악화” 금고형
의료계 “이러면 누가 진료하겠나”
구역·구토 등을 예방·치료하는 약. 환자의 구역·구토 증상을 조절할 때 가장 흔하게 쓰이는 약이다. 환자는 맥페란 주사를 맞거나 맥페란 알약을 복용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파킨슨병 환자에게 약을 잘못 처방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의사에게 금고형을 선고한 법원 판결을 둘러싸고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의료계에선 “제2의 이대목동병원 사태” “이런 판결이 나면 누가 적극적으로 중증 환자 진료에 나서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장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유죄 선고를 한 여성 재판장을 향해 ‘이 여자 제정신이냐’라는 글을 올렸다. 법원은 “재판장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자 인신공격”이라고 반박했다. 정치권에서도 “(판결대로) 100% 안전한 약만 써야 한다면 세상에 쓸 수 있는 약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다.

창원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민)는 지난달 30일 파킨슨병 환자에게 금기 약물인 구토 치료제 ‘맥페란’을 처방해 환자 병세를 더 악화시킨 혐의(업무상과실치상)를 받는 의사 A씨의 항소심에서 금고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심과 같은 판단이었다. 업무상과실치상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도 의사 면허는 취소되지 않지만, 전과 기록이 남고 민사 소송(손해 배상 청구) 등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A씨 사건은 경남의 한 여성 환자(83세)가 2021년 1월 병원을 찾으며 시작됐다. 그는 전문의인 A씨에게 “속이 메스껍고 구토 증상이 있다”고 했다. A씨는 가장 흔하게 쓰는 구토 치료제인 맥페란을 처방했다. 환자는 이후 실신, 발음 장애, 무기력증을 겪었다. 파킨슨병이 더 악화되자, 환자는 A씨를 고소했다.

법원은 A씨가 환자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지 미리 확인하지 않고 ‘금기 약물’인 맥페란을 처방해 환자에게 피해를 줬다고 판단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이 약을 파킨슨병 환자에겐 처방해선 안 되는 약물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파킨슨병학회는 11일 입장문을 내고 “맥페란 주사제는 임상에서 구토 증상 조절을 위해 흔히 사용되며, 장기 복용하는 경우가 아니면 파킨슨 증상 악화 확률이 현저히 낮다”며 “설사 파킨슨병 증상을 악화시키더라도 원 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 약제”라고 했다. 파킨슨병 환자에게 맥페란은 ‘절대 금지 약물’이 아니라 의사의 판단하에 처방할 수 있는 약이란 것이다.

그래픽=양진경

박재찬 경북대 신경외과 교수는 “맥페란은 가장 흔히 쓰이는 구토 치료제로 심각한 약물이 아니다”라면서 “파킨슨병 환자가 계속 구토하는 걸 방치하는 것이 더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다. 서울 종합병원의 한 신경외과 교수도 “의대에서도 파킨슨병 환자에게 맥페란을 쓰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의사들은 정부의 경직된 건강보험 정책도 이번 사고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맥페란에 비해 부작용이 덜한 구토 치료제인 온단세트론이 있긴 하지만 가격이 비싸 의사들이 처방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가격이 비싼 온단세트론을 항암 치료 외의 진료에서 쓰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이를 ‘과잉 진료’로 보고 병원에 약값 지원을 안 해준다”며 “이렇게 되면 약 구매 비용을 의사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구토 치료제로 맥페란밖에 쓸 수 없는 의료 현실을 법원이 간과했다는 뜻이다.

맥페란 때문에 환자의 파킨슨병이 더 심해졌다는 법원 논리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재승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감기약이나 소화제, 수면제도 파킨슨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며 “증상 악화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는데 맥페란이 유일한 이유라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했다. 다른 신경외과 교수는 “파킨슨병 환자는 감기에 걸리거나, 음식을 잘못 먹어도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고 했다.

의사의 과실이 있다고 해도 징역형과 거의 비슷한 금고형을 선고한 것은 가혹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의료계 인사들은 “환자를 치료하려다 실수를 한 의사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는 판결”이라며 “필수 진료과 의사들은 이런 소송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항상 의사에게 희생만 강요한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창원지법 판결이 이대목동병원 사태처럼 의사들이 위험 부담이 큰 필수 진료과를 더 기피하게 만드는 대표 사례가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대목동병원 사건은 필수 진료과인 소아과 전공을 기피하게 만든 대표적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2017년 12월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하루에 아기 네 명이 사망해 의사 네 명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진 사건이다. 원래 전공의(인턴·레지던트) 가운데 70~80%가 소아과를 지원했지만, 이 사건 이후 급격히 낮아져 2023년엔 16%에 불과했다.

아기를 받는 산과(産科)도 마찬가지다. 수원고법은 작년 4월 분만 중 과다 출혈로 뇌 손상을 입은 환자가 의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0억6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한 달 뒤엔 뇌성마비로 태어난 아기의 부모가 의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의사는 부모에게 12억원을 물어주라”는 수원지법 평택지원 판결이 나왔다. 이로 인해 현재 서울대병원마저 산과 전임의(세부 전공을 익히는 전문의)가 ‘0명’이다. 국내 5대 대형 병원인 ‘빅5′의 올해 신규 전임의도 9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바이털(생명) 의사’로 통하는 신경외과 의사들도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수도권 대학 병원의 한 신경외과 의사는 2019년 뇌출혈 환자의 가족으로부터 11억8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했다. 법원은 의료진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고 환자 측에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해당 의사는 3~4년간 거액 소송을 겪으며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번 판결로 의료계에선 노인과 기저 질환이 있는 환자에 대한 진료가 더 위축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실제 노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지방 보건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보건소는 최근 “부작용 발생 시 면허를 취소할 수 있다는 창원지법의 판결이 나옴에 따라 부작용 대처가 어려운 우리 보건소에선 감기약, 피부 질환약 등의 처방을 제한한다”고 공지했다. 감기약에 많이 들어가는 진통 소염제(염증 완화)가 위장관 출혈이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였다.

☞맥페란

환자의 구역·구토 증상을 조절할 때 가장 흔하게 쓰이는 약이다. 환자는 맥페란 주사를 맞거나 맥페란 알약을 복용할 수 있다.

☞이대목동병원 사태

2017년 12월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하루에 아기 4명이 사망해 소아청소년과 의사, 간호사 등 7명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은 2022년 12월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이 사태 이후 필수 의료 기피 현상이 심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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