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개정 헌법의 전문, 무엇을 넣고 뺄 것인가?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4. 6. 1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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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의 특정 사건에 대해 국가가 유권해석 강제할 수 있나
4·19 이어 6·25 5·18도 거론
자유주의 원칙에 따르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논쟁
각국 헌법, 前文 없는 경우도 많아
여의도발 개헌 돌풍 일기 전에 시민사회 대토론 시작해야
지난 5월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선고를 앞두고 착석한 이종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 /박상훈 기자

22대 국회가 개원부터 파행이다. 야당 총수 구속이냐? 대통령 탄핵이냐? 흥분한 관중의 환호 속에서 서로 죽이려 칼을 휘두르는 검투사들의 혈투 같다. 진정 우려스러운 바는 불끈 쥔 주먹을 흔들며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세력이 다른 한 손에 개헌 카드를 쥐고 있는 현실이다.

현시점에서 개헌의 필요성엔 찬동할 수 있다. 1987년 체제 아래서 7번의 대선과 10차례의 총선을 치렀고 네 번이나 정권을 교체했다.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큰 성과였으나 나라 안팎의 도전을 고려할 때 이미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통령 5년 단임제가 앞으로도 최선일 순 없으며, 1980년대의 사고 틀이 미래 세대에 통할 리도 없다. 세계사적 변화에 대응하면서 헌정사의 교훈을 반영해 헌법을 더 좋게 고친다면 대찬성이다.

개헌의 당위를 인정함에도 희망보단 불안이 앞선다. 당리당략에 매몰된 정치판에서 개헌은 정쟁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 리스크에 내몰린 야당 대표들이 졸속한 개헌을 밀어붙이고 열세에 처한 여당이 눈치만 보다 작당하듯 따라간다면 최악이다. 개헌은 필요한데 국회를 신뢰할 수 없기에 공화국 시민들이 나서는 방법밖에 없다. 민주공화국에서 헌법 제정과 개정의 주체는 바로 국민이다. 여의도발 개헌 돌풍이 일기 전에 시민사회가 선제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범국민적 대토론을 이끌어야 옳다.

논쟁의 첫째 주제는 단연 “헌법 전문(前文)에 무엇을 넣고 뺄 것인가?”여야 하지 않을까. 헌법 전문에 3·1, 4·19에 덧붙여 6·25, 5·18, 6·10 등등 특정 역사 사건들을 삽입하자는 “원 포인트(one point)” 개헌안이 조야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건설적 토론을 위해선 우선 전 세계 국가들의 헌법 전문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2018년 국회도서관은 전 세계 40개 주요국의 헌법들을 완역한 ‘세계의 헌법’을 새로 펴냈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이 책을 보면 헌법에 전문을 따로 두지 않는 경우가 40국 중 16국이나 된다. 스웨덴, 덴마크, 남아프리카공화국, 이탈리아, 칠레 등의 헌법이 그러하다. 나머지 24국은 헌법에 전문을 두었지만, 그중에서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을 언급한 사례는 중국, 이라크, 대한민국 등 8국에 불과하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대표적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헌법 전문에서 특정 역사 사건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거론하는 대신 “1789년 인권선언”을 다시 천명한다. 반면 중국, 이라크, 이란, 북한 등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는 독재국가들의 헌법 전문은 대개 장황하고 권위적이며 극적 미사여구로 가득 차 있다. 왜 그러한가? 사상·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생명으로 삼는 자유주의 원칙에 따르면 국가가 과거사의 특정 사건에 대해서 유권해석을 내리고 그 해석을 획일적으로 전 국민에게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사상·양심의 자유를 묵살하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독재국가는 장황한 전문 속에 일방적 역사 해석, 독단적 이념, 나아가 특정 인물 등의 권위를 명기한다. 중국 헌법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뿐만 아니라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까지 강조한다. 그 폐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헌법 전문에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이라 써놓은 북한 같은 나라에선 누구나 “김일성”의 정신적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타 자유민주주의 헌법과 비교할 때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과 4·19혁명 등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서 “법통”과 “이념” 등 헌법의 정당성을 도출하려는 특이성을 보인다. 그 때문에 지금껏 개헌 논의가 불거질 때마다 특정 사건의 전문 삽입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자유주의 기본 원칙에 따르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논쟁이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제1 목적은 국가가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하는 것이다(헌법 제10조). 대다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처럼 헌법 전문에 특정 사건을 명기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헌법이 선양하는 자유, 평등, 민주, 공화 등은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이미 지고(至高)의 권위를 갖는다. 시민들의 공회를 열고 다시 물어야 할 때다. 과연 헌법 전문이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헌법 전문에 과연 무엇을 넣고 뺄 것인가? 시민사회의 공론만이 개헌을 정쟁화하려는 정치꾼의 모략을 분쇄할 수 있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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