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학- 철학실종시대, 사라진 강원 동학사를 찾아서] 3. 관군의 홍천 동학군 학살

김진형 2024. 6. 1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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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으로 못 가린 항일의지, 민초의 하늘을 열다
외세 침략 속 민족 역량의 탕진
강원 동학군 항일투쟁 관군 저지
잔혹한 문초 이어져 동학 금기시
민초 피해 확산·참여자 호적 제외
잔존 세력 은신 후 포교활동 지속
홍천 항쟁 ‘전국 혁명’ 의미 제고
접주 오창섭 4·1 만세운동 주도
외세 반감·개혁의식 정립 계기
지역사회 동학 전시관 마련 의지

강원도 동학군들은 당시 한양에 있는 일본군을 치는 것을 목표로 일어났으나, 쇠약해진 나라의 내부 갈등 속에 관군에게 먼저 당해야 했다. 동학군 뿐 아니라 일반 민초들도 무참하게 희생을 당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동학’이라는 말이 금기시 되었지만, 결연했던 정신은 계속 남아 지역의 독립만세 운동으로 번졌다.

■ 항아리에 넣어 살려낸 아들… 아직 못다한 섬뜩한 증언들

“초등학교 시절 장마철이면 마을 어귀 언덕바지는 온통 수렁으로 변했다. 귀퉁이가 무너져 여기저기 뼈다귀가 튀어나왔다.”

지난 해 ‘홍천 동학농민군 혁명에 대한 재조명-홍천 풍암리 자작고개 전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한 최낙인 동학혁명유족회 홍천지부장의 글귀가 섬뜩함을 안긴다.

홍천지역 동학군을 진압한 이후에는 민초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이들의 가정에서는 어린아이까지 무참하게 살육됐다.

최낙인 지부장의 증조부인 최도열은 자작고개 전투 당시 피살됐다. 당시 최도열의 아내는 갓 돌이 지난 아들(최규백)을 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닫은 뒤 산 속으로 급히 피난을 갔다고 한다. 이틀 뒤 돌아왔을 때 아이는 다행히도 포대기로 쌓인 채 잠을 자고 있었고, 그렇게 서석면 풍암리 최씨 가문은 맥을 이을 수 있었다.

고갯마루의 오래된 소나무 옆 돌배나무에 동학군의 상투를 매달아 놓고 문초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 때문에 홍천에서는 동학혁명에 관련된 이들을 호적에서 제외시킬 정도로 동학이 금기시 됐다.

40여년간 홍천 동학사를 연구한 최낙인 지부장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1970년대만 해도 이불로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끔 문을 가리고 제사를 지냈다.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힘도, 지식도 없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족들의 증언을 모아 유적지를 새롭게 발굴하는 작업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 일본군 목표로 했지만 관군에 제압 비극

역사의 아이러니도 있다. 경기 지평 감역으로 활동했던 맹영재와 같이 홍천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던 포군 400여 명이 이듬해인 1895년 지평 포수의 우두머리였던 김백선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평민 출신 김백선은 홍천 동학농민군 토벌의 공로로 절충장군이라는 품계를 받았으며 을미사변 이후 맹영재에게 의병 거병을 요청했으나, 맹영재는 거부했다. 원주에서 의병으로 거병한 김백선은 의암 류인석의 선봉대장으로 활동했으나 1896년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처형됐다.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강원지역 동학을 이끈 대접주 차기석은 당시의 양반 유생들이 나쁜 지도자로 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본 등 외세의 침략에 따라 동학 조직이 무장 봉기를 시작하면서 양반 향리와 부농 지주를 중심으로 동학과 그 지도자들을 점점 적대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 직면한 민족의 내부 갈등이 심각해진 상태에서 벌어진 국가 내부 역량의 탕진이자 비극이었다. 이 때문에 홍천의 동학군 역시 일본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경기도와 춘천의 민보군과 관군에게 제압됐다.

동학군은 이후 내면과 평창 등으로 이동했고,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의 잔존 세력은 산중에 은신하거나 서석면 주변 골짜기로 스며들어 끊임없는 포교활동을 펼치면서 후일을 도모했다. 참혹했던 희생들로 쌓아 온 역사적 진실로 인해 홍천지역에는 외세에 대한 반감과 개혁을 바라는 의식이 크게 자리 잡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역에 남은 동학 정신은 1919년 3·1운동과 연계한 물걸리 동창만세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차기석과 함께 활동했던 홍천의 동학 접주인 오창섭은 홍천의 4·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 항일정신 퇴색 못 시켜… 전시공간 필요

2004년 홍천군은 전시관을 비롯한 대규모 기념시설을 세우기 위해 대대적인 유해발굴 사업을 벌였지만, 발굴 실패로 사업은 축소됐다.

엄찬호 의암학회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인근의 교회를 지을 때 사람 뼈가 무수히 많이 나왔다는 증언이 있지만, 유골들은 현재 많이 유실된 상태”라고 말했다.

최낙인 지부장은 “풍암리 자작고개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인 농민혁명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그들의 항쟁이 없었다면 충청·전라 지역에 치우친 동학 봉기는 그 의미가 미약해진다”고 했다.

임형진 동학학회 회장도 “홍천 서석의 전투에서 다른 지역 못지 않게 많은 희생자가 나왔음에도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강릉과의 관련성도 앞으로 파악해야 한다”며 “강원도 동학군의 최종 목표는 한양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이었다. 일본군과 전투가 없었다고 해서 그들의 항일 정신을 퇴색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이어 “지금의 풍암리 동학혁명공원에 관람객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전시실이 마련된다면 자랑스러운 동학의 역사가 더욱 빛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학혁명 기념탑 인근에는 정두수 작사·이유림 작곡, 주현미가 노래한 ‘자작고개’의 노래비가 색이 바랜 채 자리잡고 있다. 노래의 첫 소절은 이렇다. “생각을 말자.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동학군 목숨 다 바친 자작고개 역사를.”

노래비에 새겨진 이 노래의 첫 소절을 보고 돌아가는 길, 하얀색 토종 민들레(사진)가 굳건한 생명력으로 피어 있었다. 김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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