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이해되지 않는 것들과 살아가기
생전의 데이터를 활용하여 가상세계에 고인을 복원해서 영상통화로 교감할 수 있게 해 주는 인공지능 서비스를 다룬 영화 <원더랜드>를 봤다. 인공지능 기술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기발하다고까지 할 만한 발상은 아니지만, 잔잔하고 고달픈 일상과 웅장하고 세련된 환상을 넘나들며 사람을 안다는 것의 의미, 혹은 그리움을 아련히 떠올리게 했다.
다른 분들은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궁금해서 포털사이트의 일반인 영화평에 들어갔다가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많은 지지를 받은 평일수록 원색적이고 단선적인 비난 일색이었다. 물론 누구나 쓸 수 있는 관람평이니 어떤 말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각 인물의 서사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고 편집의 흐름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다는 평가에는 동의가 되는 면도 있다. 하지만 어떤 평들은, 돈을 지불했으니 자신의 취향에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화가 난다는 비난에 가까웠다.
비용을 지불하는 상품인 영화에 대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충분히 그럴 법하다. 영화뿐 아니라 어떤 대상이든 나의 예상과 다른 것, 언뜻 이해되지 않는 것을 만날 때 외면하거나 부정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다만 그때, 저건 뭘까, 왜 저렇게 해야 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바로 그곳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되고 조금은 다른 세계가 열리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값을 치르고 사는 대상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문해력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전반적으로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문해력이 필요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해되지 않는 것까지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우리 삶을 영위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게 폐쇄된 좁은 인식에 머물며 이해되는 것만 이해되는 대로 보며 살아가는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곁에 있는 사람을 다 내가 선택할 수 없다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과 모호하고 불안한 대로 소통하는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의 문해력이 필요한 이유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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