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칼럼] SK 기업가 정신이 `위험한 행위`인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재판부가 지난달 30일 내놓은 판결문에서 가장 많이 쓴 문구 중 하나가 '모험적이고 위험한 행위'라는 말이었다. 총 7번이나 사용했다.
요약하면 최 회장의 부친인 최종현 선대회장이 태평양증권(현 SK증권)과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등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사돈관계를 보호막 또는 방패막이로 인식해 '모험적이고 위험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여기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이 최 선대회장에게 들어갔을 것이라고 판단하며, 최 회장이 소유한 거의 모든 재산을 분할 대상으로 간주해 사상 최대인 1조3808억원의 재산분할과 20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판결했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약속어음과 메모를 근거로 비자금 300억원의 진위 여부, 실제로 선대회장이 이를 받아 경영권 강화에 사용했는지 여부, 그리고 한국이동통신 등의 인수 과정에 노 전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등을 판단하는 건 논쟁거리다. 대법원이 최 회장 측의 상고를 받아들일 경우, 이를 근거로 재산분할 범위를 정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합당한지 등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해당 내용은 법의 판단에 맡기면 될 일이지만, 그 전에 아쉬운 대목이 있다. 재판부가 최 선대회장의 인수·합병(M&A) 결정을 '모험적이고 위험한 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기업의 지속가능 성장을 위해 리스크를 감수하고 추진하는 M&A를 정경유착 없이는 어려운 위험한 일로 판단한 것이다.
팩트로만 보면 재판부가 노 전 대통령의 후광으로 성사됐다고 한 한국이동통신 인수는 김영삼 정부 때 이뤄졌다. 태평양증권은 SK 인수 이후 9000억원 이상의 누적적자를 이어가다 2018년 사모펀드에 매각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재판부는 또 천문학적인 재산분할의 근거로 노 전 대통령의 임기 직전인 1987년 자산총액 기준 재계 7위였던 SK그룹이 1992년 5위(246% 증가)로 성장한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숫자는 맞다. 그런데 같은 기간 현대그룹(증가율 188%)과 삼성그룹(235%), 대우그룹(119%), LG그룹(211%) 등의 성장세와 비교하면, 숫자만 가지고 SK만 특혜를 받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당시 재계 8위인 기아(330%)의 성장세가 더 두드러졌다.
더구나 SK그룹의 비약적인 성장은 오히려 노 전 대통령이 구속된 뒤, 최 회장이 취임한 이후에 이뤄졌다. 최 회장이 취임한 다음해인 1999년 32조8000억원이었던 자산총액 규모는 10년 뒤 85조5000억원으로 3배가량 늘었다. 특히 SK하이닉스를 인수한 뒤 본격적인 수익이 창출되던 2014년에는 144조7000억원, 2019년 218조원에 이르렀고,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본격적인 실적 반등을 이어가면서 올해 초 기준 자산총액은 334조4000억원까지 불어났다.
2011년 최 회장이 SK하이닉스 인수 결정이 이 같은 성장에 큰 역할을 했는데, 당시 출입기자였던 필자는 외부 뿐 아니라 내부 경영진에서도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천문학적 투자가 지속해서 이뤄져야 하는데다 호황기와 불황기가 극명하게 갈리는 반도체 산업 특성탓이었다. 석유화학과 통신이 주력이던 SK그룹이 과연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많았다. 그리고 전자 제조업과 같은 연계되는 사업도 없었기 때문에 계열사 간 시너지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여론은 최 회장이 '위험하고 도전적인 행위'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 많았다. 최 회장은 결심을 바꾸지 않았고, 그 결과가 지금의 SK그룹을 만들었다.
재판부가 정경유착의 근거로 제시했던 '위험하고 도전적인 행위'는 '기업가 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 정신이 결과적으로 세계가 경탄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국가 주도의 산업 육성과 정경유착도 있었겠지만, 주요 기업 창업주들의 기업가 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최 회장의 외도나 노 관장의 불법 비자금의 국고 환수 여부에 대해 두둔할 생각은 없다. 다만 개인사로 인해 부친의 기업가 정신이 '모험적이고 위험한 행위'로 치부된 것, 그리고 본인이 쌓은 업적까지도 정경유착의 결과물로 결론 낸 사법부의 판단을 보면서 최 회장 개인의 마음은 여간 쓰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최 회장은 항소심 재판 직후 그룹 총수이자 경제단체의 대표라는 공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모쪼록 이번 이혼 소송이 기업가 정신의 훼손이나 기업의 사회적 가치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이어지진 않길 바란다.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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