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마저 놓아버린 대통령 거부권 [세상읽기]

한겨레 2024. 6. 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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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조끼를 입은 ‘채 상병 특검 거부권 저지 청년긴급행동’ 소속 청년들이 지난 5월21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대통령의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비판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윤석열 대통령은 재의요구권(거부권)의 왕이다. 윤 대통령은 2년 임기를 막 지났지만 벌써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다(14건). 1·2위 간 격차도 압도적이다. 2등 노태우 전 대통령은 5년 임기 내내 총 7건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기간을 헌정사 전체로 넓혀도 그렇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행사한 거부권은 45건이지만,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연명했던 그의 임기는 10년이 넘었다. 윤 대통령 현재 재임 기간인 2년으로 환산하면 이 전 대통령의 거부권도 9건에 그친다.

거부권은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이다. 누구나 안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거부권은 예외적으로, 신중히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권분립의 원칙, 국회 입법권 존중 원칙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역대 대통령 대부분 임기 내내 한 자릿수에 그칠 만큼 거부권을 제한적으로만 사용했다. 권한 남용으로 평가받을까 걱정했고(정치적 책임), 또 다른 선출 권력인 국회의 입법권을 왜 대통령이 견제하려는지에 대해 신중하게 설명(논증 책임)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에는 이 두가지가 없다. 걱정과 설명이 없다. 정치적 책임과 논증 책임이 없다. 먼저 ‘걱정’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국민의힘 초선 당선자와의 만찬에서 ‘22대 국회에서 여당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인 거부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취지로 발언했다고 보도되었다. 귀를 의심할 만한 이야기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해당 법안에 중대한 헌법 위반이 있거나, 행정부로서 집행이 불가능하거나, 국익에 위반되는 명백한 사유가 존재할 때 정당화된다. 아니, 그런 게 없다고 하여도 정치적 책임을 지키려는 대통령으로는 최소한 그런 사유가 있다고 억지라도 부린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목소리로 입법부 구성원에게 ‘특정 정당의 협상력을 위해 거부권을 활용’하라고 말했다. ‘법안 이대로 올라가면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할 거니까 수정하라’는 협박을 하라고 여당 의원들에게 주문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엔 헌법이나 국익 같은 껍데기조차 사라졌다.

다음으로 ‘설명’이 없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환부하는 법률안에 붙이는 ‘이의서’는 법률의 위헌성을 다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처럼, “제출자: 대통령”으로 기재된 역사적이고 헌법적인 문서다. 대통령의 예외적인 권한 행사에 대한 근거가 충실하게 기재되어 있어야 한다.

윤 대통령 이의서에는 거짓말이 상당하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특별검사를 도입한 전례는 없다’가 대표적이다. 헌법재판소가 이미 합헌이라 판단한 쟁점에 대해 위헌이라 억지를 부리는 내용도 상당하다. 윤 대통령 이의서에는 ‘특별검사 후보자 추천권이 야당에만 있으면 대통령 임명권 침해로 위헌’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소위 박근혜 국정농단 특검법 사건에서 “여당을 특별검사후보자 추천권자에서 배제하고 야당으로 하여금 특별검사후보자를 추천”해도 합헌이라 했다. 이 2019년 헌법재판소 판단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이 그저 ‘민주당 추천은 위헌’이라고만 하면, 억지일 뿐이다.

말문이 막히는 논리도 가득하다. 소위 ‘쌍특검법’ 이의서에서는 ‘불문 헌법’이 등장했다. ‘특별검사 법률을 도입할 때 여야 합의로 하는 것이 불문 헌법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헌법적 관행’이란다. 2004년 헌법재판소가 ‘수도가 서울인 것이 헌법’이라며 ‘경국대전’, ‘관습헌법’ 운운했던 것과 동급이라 할 수 있는 법적 코미디다. 대통령은 한우산업 지원법안에도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그 이유가 “돼지·닭 등 다른 축종 사육농가와의 형평성이 저해”된다는 것이었다. 한우농가 호수가 급감하는 현실, 2026년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일정에 따라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관세가 폐지된다는 이야기는 한 줄도 없다. 국회가 뜬금없이 한우산업 지원법을 제정하겠나? 이 정도면 법률안 자체에 대한 몰이해를 자백하는 수준이다.

당리당략을 위한 거부권 행사를 대통령이 자인하고, 거짓말 또는 억지 수준의 논거로 거부권 행사를 정당화하는 폐허 속에서 남는 것은 순수한 힘의 폭주다.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5일 “입법 독재가 진행되면 수백건의 거부권이 행사될 것”이라고 했다. 허언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권한 남용에 대한 일말의 수치심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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