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수박’인가? [이진순 칼럼]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보수와 진보의 진영논리가 정치 양극화를 초래한다’는 말은 사실일까? 적어도 2024년 대한민국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적대적 진영 대결은 존재하지만 보수와 진보의 핵심가치는 정치권에서 빠르게 소멸 중이다. 국민의힘이 ‘채 상병 특검법’을 거부하며 보수에 등을 돌리고, 더불어민주당이 기층 서민을 대변하는 진보의 가치를 외면한다면 양당의 대치는 이념 투쟁이 아니라 이권 투쟁일 뿐이다.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는 주식·채권·펀드 등으로 얻은 수익 중 5천만원 초과분에 대해서 20%의 세금을 걷는 제도다. ‘소득이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조세 원칙 아래 2020년 도입된 금투세는 예정대로라면 2023년 1월부터 시행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시행을 열흘도 남겨놓지 않은 2022년 12월23일, 금투세 2년 유예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재석 의원 271명 중 찬성 238명, 반대 10명, 기권 23명의 압도적 가결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금투세 시행과 관련해 개미투자자들이 피해받는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신중하게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민주당 당론이 급격히 변한 까닭이다.
기세를 몰아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한발 더 나아갔다. 내년 1월로 미뤄진 금투세 시행을 백지화하고 금투세를 아예 폐지하는 안을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내놨다. 2년 전 속칭 ‘동학개미’들의 세 과시로 금투세 시행을 좌초시킨 일부 개인투자자들이 다시 일어났다.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는 5월30일 22대 국회의원 임기 시작일에 맞춰서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앞에서 금투세 폐지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민주당의 태도는 모호하다. “자본시장이 성숙할 때까지 (금투세 시행을) 좀 더 유예하자는 안은 유연성을 갖고 얼마든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근로소득보다 자산소득으로 인한 불평등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소득격차를 완화하고 증세를 통해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진보 세력이 마땅히 고수해야 할 기본 이념이다. 금융투자로 연간 5천만원 이상 수익을 얻는 사람은 전체의 1% 미만이라고 알려져 있다.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정당이 상위 1%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행태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간 친명계 당권파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겉만 민주당(파란색)이고 속은 국민의힘(빨간색)인 ‘수박’이라고 날카롭게 성토해오지 않았나? 적어도 조세 정책에 관한 한, 민주당 당권파는 수박이다.
종합부동산세(종부세)를 완화하자는 주장도 민주당에서 먼저 나왔다. 박찬대 원내대표와 고민정 최고위원이 1가구 1주택자 종부세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중산층 세 부담을 줄여서 한강벨트의 민심을 얻자는 논리다. 대한민국에서도 서울, 그중에서도 한강 인접지역에 ‘똘똘한 한채’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라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은 유권자 다수의 바람은 아닐 텐데 말이다. 상속세 부담 완화 방안도 나왔다. 지난 4일 임광현 민주당 원내부대표는 집값이 올라 상속세를 물게 된 ‘중산층에 대한 세 부담 완화’를 위해 상속세제를 개편하자고 했다. 정점식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그간 민주당이 상속세 개편을 부자 감세라며 반대해왔는데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꾼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은 금투세와 종부세 폐지에 반대한다. 참여연대가 리서치뷰에 의뢰해 지난달 28일부터 30일까지 전국 18살 이상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2대 국회에 바라는 조세·재정 정책 국민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1주택자 종부세 폐지안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52%가 반대하고 그 절반인 27%만 찬성했다. 진보, 보수 성향 상관없이 반대가 높았다. 금투세 폐지 방침에 대해서도 57%가 반대, 27%가 찬성이었다.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39%로 나왔고 ‘모르겠다’가 31%, 부정 의견 30% 차례였다.
‘국민주권시대 당원중심주의’를 강화하겠다는 민주당은 왜 이런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국민공청회나 당원토론회를 열지 않는가? 특정인 맞춤형 당헌·당규 개정에만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다. 소년공 출신의 정치인은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던 지지자들에게 이것이 부자 감세가 아니라 대다수 서민을 위한 합리적인 개편안이라고 설득할 수 없다면 그 노선은 채택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국회 권력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쓸 것인지 분명한 색깔로 답해야 한다. 지금대로라면 보수의 사멸에 이어, 진보도 22대 국회에서 멸종희귀종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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