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욕 드러낸 일본 “우리 ‘이익선’ 초점은 조선”

길윤형 기자 2024. 6. 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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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08

후쿠자와는 1885년 3월16일 이웃에 지나(중국)와 조선이 있다는 사실을 일본의 “불행”이라 평하면서 “이웃의 개명(開明)을 기다리고 함께 아시아를 발전시킬 여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조선에 변고가 생길 경우 ‘강력’으로 청을 제압한 뒤 ‘조선 독립’이라는 허명을 내세워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할 터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출신의 인물로 당대 육군의 최고 실력자였다. 1889년 12월 일본의 제3대 총리에 오른 그는 “일본 이익선의 중심은 실로 조선”이며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일본이 군사력을 완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국립국회도서관

조선·대한제국이 망국으로 향해 가는 마지막 30여년(1876~1910)의 역사를 복기할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질문은 일본이 언제부터 한반도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심’을 품게 됐는지이다. 이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위정자들이 처음 느끼게 된 감정은 ‘야심’이라기보다 저 나라 때문에 큰 화를 입을 수도 있겠다는 ‘근심’이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1882년 7월 임오군란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이 낳은 천재 중 한명인 참사원 의관 이노우에 고와시(1844~1895)는 임오군란 직후인 9월17일 ‘조선정략’이라는 글에서 “조선의 일은 장래 동양 교제정략(交際政略)의 일대 문제가 되어 2~3개 대국 간에 어쩌면 이 나라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 우려는 2년 뒤 갑신정변을 통해 거듭 확인된다. 조선을 이대로 방치했다간 머잖아 청이나 러시아와 일전을 치르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은 메이지 유신(1868)을 성공시킨 근대 일본이 처음 마주하게 된 심각한 ‘안보상의 난제’였다.

일본 위정자들이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근본 이유는 군사력이 청과 러시아에 견줘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오타니 다다시 센슈대학 교수의 책 ‘청일전쟁’(2014)에 따르면, 일본은 1873년 ‘국민 징용제’를 도입해 근대적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임오군란이 터지던 1882년 육군의 동원 가능 병력은 상비병 1만8600명과 예비역 2만7600명을 더한 4만5000명, 해군 규모는 24척(총 배수량 2만7000t)에 불과했다. 반면 청은 1880년 리훙장(이홍장) 북양대신이 이끌던 회군(안후이성 허페이 병력)만 10만명이었다. 1885년 취역하게 되는 독일제 7000t급 전함인 정원·진원을 갖춘 북양해군의 위용 역시 대단했다. 일본은 어쩔 수 없이 1882년 10~12월께 “동양평화라는 대국적 관점에서 당분간 (조선에 대해) 소극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한다. ‘대결’이 아닌 ‘협조’라는 틀 안에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달성해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청과 협조하며 조선의 자주독립을 실현하는 것은 동시 달성이 불가능한 모순적인 목표였다. 이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이노우에는 조선정략에서 청·일이 미국·영국·독일 세 나라와 협력해 조선을 ‘영구 중립국’으로 만든다는 묘안을 내놓는다. 조선이 중립국이 되면, 청·일 관계를 보전하면서도 조선을 자주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노우에는 이를 통해 러시아를 견제해 동양의 균세(세력균형)를 유지하는 등 “동양의 정략에 있어 조금 안전한 방도를 얻을 것”이라 봤다.

이는 이노우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당대 조선에서 외국어·국제법 등에 가장 능했던 유길준(1856~1914)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역시 1885년 내놓은 ‘중립론’이라는 글에서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보자면 아시아의 인후(咽喉)에 위치해서 유럽의 벨기에와 같다”며 조선이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는 것은 실로 러시아를 막는 관건(大機)이자 아시아의 대국이 서로 보전할 수 있는 정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과 일본의 두 인사가 극동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한 조선이 독립해야 ‘세력 균형’과 ‘동양 평화’가 유지된다면서,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조선 최초의 일본·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1856~1914)은 1880~1890년대 국제법과 서양 사상 등에 밝은 사람이었다. 갑신정변(1884) 직후 미국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해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1892년 무렵까지 연금생활을 했다.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대대적을 뜯어고치려 했던 갑오개혁의 주역이 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구상이 실현되려면 두개의 큰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첫째, 조선이 중립국이 될 만한 ‘실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조선 중립론이 나오던 때는 청·일의 타협으로 한반도 정세가 비교적 안정됐던 기간(1885~1894·톈진조약에서 청일전쟁까지 10년)과 겹친다. 조선이 제힘으로 개혁을 시도할 수 있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의 연구를 보면, 1900년대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조선의 5배, 재정 규모는 50배였다. 조선의 경제력은 일본의 5분의 1 수준이지만, 재정 규모는 50분의 1에 불과했다는 의미다. 국가가 세금을 잘 거둬 국가 발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화폐·세제·재정·금융 개혁을 서둘러야 했다.

물론 대규모 내정 개혁을 추진했던 경험과 능력이 없었던 조선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 의지’였다. 청·일의 협조 체제가 가동되며 국제 정세가 안정되자, 고종과 민씨 척족은 마침내 원하던 평화를 얻게 된다. 이들은 나라에 돈이 없어 악화(당오전)를 찍어내고 파렴치한 매관매직을 일삼으면서도, 본인들의 ‘기득권’이 보장되는 현실에 안주했다.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개혁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황현은 저서 ‘오하기문’에서 “여러 피폐한 정치는 모두 10년 이내에 늘어난 것으로 (당대의 세도인) 영준(민영준·훗날 민영휘로 개명·1852~1935)이 국정을 좌우함에 이르러 더 극심해졌다”며 왕실의 사치, 매관매직, 민씨 척족들의 부패를 낱낱이 고발했다.

두번째 장애물은 종주국을 자임하는 청의 반대였다. 이후 역사가 보여주듯 청은 ‘마지막 속방’인 조선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를 잘 알았던 ‘현실주의자’ 유길준은 중립론에서 “일관된 방략은 중국에 달려 있을 뿐”이라며 “우리 정부가 간절하게 이를 요청하기 바란다”고 적었다. 하지만 조선은 요청하지 않았고, 중국 역시 받아들일 뜻이 없었다. 결국 이 시기 중립론은 단순한 구상에 그치고 만다.

조선의 중립국화가 현실적이지 않다면, 일본에 남은 선택지는 ‘군비 확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노우에의 ‘조선정략’이 나오기 한달 전인 1882년 8월15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참의(참모본부장 겸임)는 ‘육해군확정에 관한 재정상신’이란 문서를 각의에 제출했다. 그는 일본의 전력이 청에 뒤처져 있다며 군함은 48척으로, 육군 상비병은 4만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춰 오야마 이와오 육군경과 가와무라 스미요시 해군경은 1883년부터 1890년까지 8년간 추진해 나갈 군비 확장계획을 제출했다. 이후 일본은 주조세·연초세 증세를 통해 군사력을 맹렬히 키워갔다. 그 결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해군 전력(총 배수량 5만9100t)은 청의 북양함대(8만5000t)를 거의 따라잡았고, 육군도 7개 사단(1893년 개정된 전시편제에 따라 1개 사단의 평시정원은 9199명, 전시정원은 1만8000명)을 기축으로 한 강군으로 거듭났다.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처음 내놓은 이는 메이지 시기 일본이 낳은 천재 중 한명인 이노우에 고와시(1844~1895)였다. 그는 1882년 조선정략이라는 글에서 일본과 청·미국·영국·독일 등이 조선을 벨기에.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국회국립도서관

달라진 일본의 모습은 8년 전 군비 확장을 주장했던 야마가타의 1890년 12월6일 시정방침연설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이날 일본의 이후 안보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이익선’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국가 독립과 자위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권선을 지키는 것, 둘째는 이익선을 보호하는 것이다. 주권선은 국가의 영토를 말하는 것이고 이익선은 주권선의 안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열국들 사이에서 국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권선만 방어해서는 충분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익선을 보호해야 한다.”

야마가타는 이날 일본의 이익선이 어디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같은 해 3월 내놓은 ‘외교정략론’에선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또 이익선을 방어하려면, 때로는 “강력(强力·군사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는 날이 곧 조선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때”라며 청·일이 러시아에 맞서려면 조선에서 동시 철군을 결정한 톈진조약를 폐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야마가타는 조선 독립이란 명분과 대청 협력의 필요성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김옥균을 지원했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지신보’ 1885년 3월16일치에 실린 ‘탈아론’이란 무기명 사설에서 이웃에 지나(중국)와 조선이 있다는 사실을 일본의 “불행”이라 평하면서 “이웃의 개명(開明)을 기다리고 함께 아시아를 발전시킬 여유가 없다”는 절교 선언을 한다. 주변국에 대한 이런 멸시가 사회 내에 뿌리내렸다면, 조선에 변고가 생길 경우 일본은 ‘강력’으로 청을 제압한 뒤 ‘조선 독립’이라는 허명을 내세워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할 터였다. 일본이 그렇게 생각을 굳혀갈 무렵, 1894년 초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반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다. 청일전쟁이 비로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길윤형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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