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메이커’ 넘어 ‘킹메이커’로…세기의 연준 의장[더 비저너리 제롬 파월]
중도 실용주의자…‘올빼미파’ 의장
역사적 금리 결정…대선에도 영향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그것은 일종의 가정이다. 사실은 우리가 잡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1991년 9월 4일, 대형 투자은행 살로몬 브라더스의 국채 부정 입찰 사건 관련 하원 청문회에 출석한 제롬 파월(Jerome Hayden Jay Powel, 제롬 헤이든 제이 파월) 미국 재무부 차관보는 터무니없이 큰 금액의 부정 입찰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재무부가 일련의 사건을 적발하지 못했을 것이란 한 의원의 공격에 이렇게 되받아쳤다.
재무부에 입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38세 차관보는 쟁쟁한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즉각 답변하고 오히려 반박까지 하며 청문회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훗날 미국 경제를 넘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 오른 파월이 처음으로 전국에 얼굴을 알린 데뷔 무대였다.
40여 년 만에 비(非)경제학자 출신으로 연준 의장에 오른 파월은 코로나19 기간 양적완화로 치솟은 물가를 잡으려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한 역사적 의장이 됐다.
연준의 통화정책이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 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그의 입에 주목하고 있다.
파월은 1953년 미국 워싱턴 D.C.의 법률가 집안에서 6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파월은 변호사인 아버지 제롬 파월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외할아버지 제임스 J. 헤이든은 미국가톨릭대학교 컬럼버스 법학대학의 학장을 지낸 뒤 조지타운 로스쿨 강사로 일했다.
파월 의장이 당연히 경제학을 전공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추측하지만 사실 그는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 학사를 받은 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법학 박사를 받은 경제 비전공자다.
로스쿨 졸업 이후 3년간 변호사로 일한 파월은 1984년 월가의 투자은행 딜런 리드 앤 코(Dillon, Read & Co.)에 입사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니콜라스 F. 브래디 딜런 리드 앤 코 회장을 만나게 된다.
브래디 회장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인 1988년 미국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정부에서 연임됐다. 딜런 리드 앤 코에서 파월을 눈여겨 봤던 브래디 장관은 1990년 그를 재무부로 영입했다.
1991년 살로몬 브라더스의 국채 부정 입찰 사건이 터지자 재무부 차관보였던 파월을 의회 청문회에 내보낸 것도 브래디다. 당시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위기에 처한 살로몬 브라더스의 임시 회장을 맡았는데, 파월은 이 은행의 국채 입찰 자격 박탈을 막는 데 기여해 “버핏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파월은 1992년 불과 39세의 나이에 재무부 차관으로 임명된 뒤 1993년 빌 클린턴 정부로 바뀔 때까지 재임했다.
이후 재무부를 나와 뱅커스 트러스트 상무이사를 거쳐 다시 딜런 리드 앤 코 이사로 일하던 파월은 1997년 글로벌 투자회사 칼라일 그룹의 파트너(이사)로 스카우트된다.
파월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1년 연준 이사로 지명된 후 2012년 5월부터 연준에서 일했다. 그는 당시 공화당원이었는데, 대통령이 야당 인사를 연준 이사로 지명한 것은 1988년 이후 처음이었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을 해임한 후 파월을 임명, 2018년 2월부터 의장직을 맡고 있다.
비경제학자 출신인 파월이 연준 의장으로 발탁된 것은 파격 인사였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인 1979년 임명된 폴 볼커 이후 40여 년 동안 연준 의장 자리는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재닛 옐런 등 쟁쟁한 경제학자들이 도맡아 왔기 때문이다.
40년간 유대인이 차지해 온 자리에 비유대인이 임명됐다는 점에서도 파월의 인사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비경제학자이자 비유대인인 파월이 연준 의장이라는 중책까지 오른 것은 작은 용기에서 시작됐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파월 의장은 지난달 모교인 조지타운데 로스쿨 졸업식 축사에서 “딜런 리드 앤 코 재직 당시 브래디 회장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기회가 있다면 정부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었다”고 털어놨다.
브래디 전 장관은 그 일을 계기로 석유회사에 대한 적대적 인수 시도를 방어하는 일을 할 때 파월 의장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몇 달 간 워싱턴 D.C.를 오가면서 함께 일했다.
몇 년 후 재무부 장관이 된 브래디는 파월 의장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공직에서 일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면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파월 의장은 “당시 자리에서 일어나 15층 계단을 올라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내 남은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작은 용기가 나의 인생을 바꾼 것처럼 용기 있는 작은 행동이 여러분의 미래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여러분 모두는 본인이 선택한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 만큼 자신의 재능을 어떻게 환원해 변화를 가져올 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로스쿨 학위를 받고 몇 년 후 법조계를 떠났지만 당시 받은 교육이 정부에서 일할 기회를 포함해 이후 다양한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밝혔다.
수십 년간 공고히 유지돼 온 벽을 보기 좋게 뛰어넘은 파월 의장은 후배들에게 “자신을 넘어서는 생각을 하라”고 조언했다.
파월이 연준 의장으로 발탁된 배경에는 투자은행에서 일할 당시 뛰어난 성과로 이름을 날린 것과 관계가 있다. 파월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칼라일 그룹 파트너로 일하며 칼라일 미국 바이아웃펀드 내의 인더스트리얼 그룹을 설립하고 이끌었다. 당시 그는 베어링 회사 렉스노드의 인수·합병(M&A)을 주관해 무려 9억달러(약 1조2400억원)의 시세 차익을 남기고, 자신도 인센티브와 투자 이익 등 수천만 달러를 벌었다.
칼라일 그룹을 나온 후에는 직접 투자회사 세빈캐피털파트너스를 설립해 산업 부문 전문 금융과 기회주의적 투자에 주력했다. 2008년에는 지속 가능한 에너지에 투자하는 사모펀드 및 벤처캐피털 회사인 글로벌환경펀드(GEF)의 파트너를 맡기도 했다.
파월은 투자가로서 화려한 이력을 남기면서 수백억 원의 재산을 모았다. 연준 의장 임명 당시 워싱턴포스트(WP)는 파월의 자산이 5500만달러(당시 약 600억원)에 달한다며 “1948년 이후 가장 부유한 연준 의장”이라고 전했다.
파월은 투자회사 외에 여러 기관에서 일하며 ‘실용적 사상가’로서의 면모도 드러냈다.
그는 2010~2012년 워싱턴의 싱크탱크 초당적정책센터(BPC)에서 연봉 1달러를 받고 방문 학자로 일했다. 2011년 미국의 부채 한도 위기가 오자 파월은 채무불이행(디폴트)나 부채 한도 상향 지연이 경제와 금리에 미치는 영향을 제시해 의회가 부채 한도를 상향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2017년엔 은행감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는 ‘도드-프랭크 월가 개혁 및 소비자보호법’에서 규정한 더 높은 자본 및 유동성 요구 조건과 스트레스 테스트가 금융 시스템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으며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금융기관의 위험투자를 제한하기 위해 도드-프랭크법에 포함된 ‘볼커 룰’에 대해선 소형 은행을 제외하는 방향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파월은 경제를 학문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실무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월가를 비롯해 정가에서도 주목 받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임명 당시 이전과 다른 배경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무난한 인사라는 긍정적 평가가 나온 것도 그의 성과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의 안전한 도박”, 뉴욕타임스(NYT)는 “옐런의 공화당 버전”이라고 평했다.
파월 의장 본인도 자신감을 드러내며 일각의 우려를 일축했다. 미 경제전문매체 머니와이즈에 따르면 그는 2019년 워싱턴D.C.경제클럽 대담에서 “경제학 학위 없이도 잘 해냈기 때문에 누구도 내 학력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며 “나는 통화 경제학을 배우는 시간이 많았다”고 피력했다.
파월은 월가에서 ‘미스터 오디너리(Mr. Ordinary·평범한 사람)’로 평가 받았다. 성격이나 생활, 사상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취미는 자전거 타기와 음악 감상, 기타 연주, 골프로 알려져 있다. 자택에서 10㎞ 이상 떨어진 연준까지 자전거로 통근을 하고, 클래식 공연과 골프 클럽을 즐겨 찾는다. 기타는 대학 시절 버스킹을 한 적도 있으며 이후로도 가끔 연주한다고 한다.
자신을 내세우는 성격도 아니고 친절하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그래서인지 통화정책도 이전 의장들보다 친절하고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미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전 연준 의장) 벤 버냉키의 모국어가 경제학인 것처럼 들린다면, 제롬 파월의 모국어는 확실히 영어”라고 평했다.
연준 이사로 일할 때나 의장 취임 이후에도 그는 강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중도파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견지했다.
때문에 파월은 매파(통화 긴축 선호)나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 의장이 아닌 ‘올빼미파’ 의장으로 평가된다. 리처드 피셔 전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파월을 가리켜 “현명한 올빼미”라고 표현했다.
파월 의장은 2018년 2월 취임 선서에서 “내 임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왜 하는지 설명할 것을 약속하겠다”면서 “연준의 내 동료와 나는 객관성과 독립성, 성실함을 갖고 우리나라와 미국인을 위해 봉사하는데 전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우리 금융시스템은 10년여 전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이전보다 훨씬 강하고 더욱 탄력 있다”면서 “우리의 금융시스템이 그러한 길을 유지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의장을 맡은 파월은 2018년 12월 미국의 경기 확장세에 대응해 기준금리 인상을 결정하고, 양적긴축 과정에서 4년간 연준의 보유 자산을 4조5000억달러에서 2조5000억~3조달러 수준으로 축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행보가 마음이 들지 않았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연준의 정책은 미쳤다. 연준은 최대 위협”이며 “파월은 적”이라고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금리를 인하하지 않는 것에 격분해 파월 의장의 해임까지 논의했다.
하지만 파월 의장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맞대응하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정치적 외압에 흔들리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소신대로 통화정책을 이어 나갔다.
“제롬 파월은 킹메이커(kingmaker)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파월 의장을 가리켜 차기 대통령을 권좌에 올릴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실력자라고 표현했다.
파월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미국 중앙은행의 수장이지만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를 넘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파월은 코로나19 시기에 연준 의장을 지내며 유례 없는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팬데믹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겹치며 물가가 치솟자 2022년 3월 0.00~0.25%이던 기준금리를 0.25~0.50%로 인상하며 2년 동안 지속돼 온 제로 금리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를 시작으로 지난해 7월까지 무려 11차례나 금리를 인상해 23년 만의 최고 수준인 5.25~5.50%까지 끌어올렸고, 현재까지 이 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물가가 안정세를 찾아감에 따라 연준은 이제 금리 인하로 피벗(통화정책 선회)해야 하는 상황을 앞두고 있다. 전 세계가 연준의 금리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파월 의장은 여느 때보다 훨씬 주목 받는 의장이 됐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연준 의장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대선 결과가 바뀔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오는 11월 미 대선의 표심을 가르는 데 경제 상황과 유권자들의 경제 인식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고, 파월 의장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연준 의장으로 임명된 후 바이든 행정부 들어 재선임된 파월은 중앙은행이 정치적 싸움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 통화정책 결정과 관련해 경제 지표에만 초점을 맞춘다며 ‘데이터 디펜던트(data dependant)’를 거듭 강조해 왔다.
하지만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연준의 금리 인하 여부는 올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어 파월로서는 경제와 정치 이중으로 부담이 큰 실정이다.
파월은 임기 초반 제로 금리 시절에는 연준을 대체로 잘 이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금리 인상기 이후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금리 대응이 늦어 물가를 더 빨리 잡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금리를 0.75%포인트씩 올린 ‘자이언트 스텝’ 등으로 선방했다는 평가도 있다. 현재는 금리 인하가 언제 적절하냐를 두고 시장의 의견이 팽팽한 상태다.
과거 파월의 행보를 환영하던 주식시장은 이제 그를 경계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파월은 증시가 급락하려 할 때마다 금리를 인하하거나 금리 인상을 미뤄 “파월 풋(Powell Put)”으로 불렸다. 연준이 시장을 떠받치는 움직임을 투자자가 하락장에서 손실을 줄이고자 매입하는 풋옵션에 비유한 것이다. 투자자들은 파월이 “주식시장을 펌프(pump)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2022년 이후 금리 인상과 함께 매파 성향을 보이면서 오히려 증시 하락을 이끌었고, 이제 시장은 파월 의장이 입을 열 때마다 두려워하고 있다.
폴리티코 기자는 파월이 연준 의장으로 지명된 후 상원 인사청문회에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파월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냐”고 농담을 건네자 기자는 “어떤 사람이 연준 의장으로 지명됐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파월은 “불쌍한 놈(Poor guy)”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파월의 농담은 선견지명이었을까. 그는 실제로 많은 풍파를 겪었고, 지금도 갈 길이 멀다
폴리티코는 파월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를 잘 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파월의 가장 큰 강점은 정치에 알러지가 있는 것이라면서 “연준 의장 역할에 대한 그의 인내심은 미국 경제의 정치학에 교훈을 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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