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외로움에 … 색채를 쌓아올린 단색화 거장
시인을 꿈꾸다 미술로 전향
50년간 佛서 화가로 활동해
향수를 꾹꾹 눌러담은 회화
'안과 밖' 연작 등 40점 전시
"같지만 같지 않습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 낳은 자식도 다 같을 수가 없어. 그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사각형 패턴을 해가지고 찍는데도 찍는 순간마다 점이 다 달라요. 그게 나는 내 그림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해요."
네모 난 캔버스에 가지런히 찍힌 수천 개의 점. 이들은 하나의 창을 이룬다. 김기린 화백(1936~2021)이 화폭에 옮긴 시(詩)적 이미지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난 그가 고향에서 어린 시절 보고 자란 한옥의 창호지문이 그 시작점이었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50년을 나가 살며 서양화를 배웠어도, 다시는 갈 수 없었던 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의 그림에 나타났다. 단순해 보여도 모습이 제각각인 점 하나 하나에는 흘러간 시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 감성을 자극하는 다양한 느낌이 담겨 궁금증을 자아낸다.
단색화의 선구자이자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기린 화백의 작고 후 첫 개인전 '무언의 영역'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오는 7월 14일까지 열린다. 단색조 화면 너머 표현된 그의 독창성에 주목한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회화 언어가 구축된 시기인 1970년대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그려진 주요 캔버스 유화 작품과 생전 공개된 적 없는 종이 유화 작품을 비롯해 김 화백이 직접 창작한 시, 인터뷰 영상 같은 아카이빙 자료 등 40여 점을 선보인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김 화백은 늘 시와 가까이 있었다. 한국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18세기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를 연구하기 위해 196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 디종대(현 부르고뉴대)에 다니며 시 집필에 몰두했던 그는 불어로 시를 쓰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미술사 강의를 들으며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965년 현지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를 거쳐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항상 시를 쓰고 싶었던 김 화백의 그림은 화면에 표현된 시와 다름없다. 특히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쌓아 올린 수많은 점을 통해 평면을 다차원적으로 탐구하면서 내면 세계(안)에서 일어나는 지각 현상과 외부 세계(밖)를 연결하고자 했다. 단순한 색과 형태에 물감의 양감만으로 변주를 준 1970년대 연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1980년대부터 작고 전까지 이어진 연작 '안과 밖'이 대표적이다. 가로와 세로의 선으로 그리드를 형성하고, 수많은 작은 단위의 네모꼴 속에 비슷한 크기의 색점들을 찍고, 그 위에 색을 수십 번씩 반복해 칠하고 쌓아 올려 작품을 완성했다.
생전에 김 화백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1차, 2차, 3차 공간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공간, 그러니까 지각 현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일례로 전시작 '안과 밖'(1985-1986)은 멀리서 보면 단조로운 검은 화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표면의 입체적인 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빛과 그림자도 그림의 일부가 되고,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진다. 김 화백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도 이런 인식 작용의 결과물이다. 점은 때로는 반듯한 평행선으로, 때로는 사선으로 정렬돼 관객의 시각을 자극하며 생동한다.
안과 밖의 매개체로서 김 화백이 점을 찍게 된 것은 '복잡한 이 세상에서 그림을 볼 때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서였다. 모든 불필요한 요소를 떨쳐내고 단순한 움직임으로 반복해 찍어낸 점 하나 하나가 같은 듯 다른 느낌일 때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표면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는 편안함을 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이는 김 화백 자신에게도 해당할지 모른다. "나는 그림을 내 자신이 따뜻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는 거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 점을 찍는 순간은 나를 다 넘어 뛰어요(뛰어 넘어요)."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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