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바지회장’ [아침햇발]

곽정수 기자 2024. 6. 1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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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왼쪽부터)과 이건희 2대 회장, 이재용 3대 회장.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2024년 6월7일은 삼성에서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 같다. 삼성전자 노조가 창사 55년 이래 처음으로 파업을 벌인 날이다. 또 고 이건희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외친 ‘신경영선언’의 31주년이기도 하다.

파업 직전 경기 기흥의 전국삼성전자노조 사무실을 찾았다. 손우목 위원장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노조는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동 사옥 앞에서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바지회장’이라고 불렀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30여년간 재벌을 취재했지만, 처음 듣는 얘기다. 재벌 총수가 ‘오너’로 불리며, 기업 안에서 절대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노조는 왜 이런 비상식적인 얘기를 했을까?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회장이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나? 회장이 리더십을 잃으면 바지 아닌가.” 노조 위원장의 설명은 간단했다. 이 회장은 2020년 5월 대국민 사과를 하며 ‘무노조경영’ 탈피를 선언했다. 나아가 노동3권 보장, 노사화합과 상생, 건전한 노사문화 정착을 약속했다. 뇌물공여사건 재판에서 형량을 감경받으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노조탄압 기업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을 낳았다. 이후 과거 무노조경영시대에 횡행했던 협박·미행·납치·유령노조 등 흉측한 용어들이 사라졌다. 2022년 8월에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노사가 임금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노사 갈등이 이어졌다. 올해도 임금인상률, 재충전 휴가 확대 등을 놓고 대립하다가 파업사태로 치달았다. 노조는 “회사가 노조를 협상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회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노조를 제쳐놓고, 노사협의회와 인금인상률에 합의했다. 노사협의회는 과거 노조탄압 수단으로 악용됐던 무노조 경영 시대의 잔재다. 노조가 엄연히 있는데, 노사협의회를 고수하는 것은 무노조 경영에서 노조무시 경영으로 옷만 바꿔 입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 회장이 약속한 노사화합과 상생과도 거리가 멀다.

인공지능(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에스케이에 주도권을 내주면서 ‘삼성 위기론’이 뜨겁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도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의 시장점유율 격차가 더 벌어졌다. 하지만 정작 임직원이 더욱 불안해하는 요인은 따로 있다고 한다. 총수의 위기 극복 메시지가 들리지 않는 점이다. 사방에서 적이 쳐들어오는데, 장수가 침묵을 지키는 꼴이다.

삼성 리더십 위기론이 제기된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이재용 회장이 삼성호의 방향키를 잡았지만, 지난 10년간 제대로 보여준 게 없다. 차세대 성장 분야를 개척하지도 못했고, 삼성 구성원의 힘을 끌어모을 자신만의 경영철학이나 비전도 내놓지 못했다. 그룹 회장에 취임한 2022년에도, 신경영선언 30주년인 지난해도 침묵을 지켰다.

삼성 위기는 본질적으로 리더십 위기다. 그 중심에는 이재용 회장이 있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선언으로 ‘혁신의 리더십’을 보였다. 양적 성장 대신 품질 중심 경영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대전환을 이뤘다. 반면 이재용 회장은 제대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며,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삼성이 디(D)램 시장에서 쌓은 글로벌 1위의 저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만, 위기가 커질수록 리더십이 절실하다.

기업 총수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뢰를 얻을 수 없고, 리더십 발휘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회장의 리더십 회복은 자신이 약속한 노사화합과 상생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해외 출장을 가고, 외국기업 최고경영자와 만나는 것도 위기 타개를 위해 중요하다. 하지만 리더십이 흔들리고, 조직 내부가 분열되어 있다면, 모래성 쌓기에 불과하다.

이재용 회장은 무노조 경영 탈피를 선언하며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자성했다. 혁신은 기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새 경영 패러다임으로 회사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 회장이 노사협력으로 위기 극복의 토대를 쌓고, 시대정신에 부합해서 국민의 박수를 받는다면, 지난 86년간 이어진 삼성의 족쇄가 비로소 풀리는 셈이다. 이것이 이 회장에게 요구되는 새 경영철학과 비전을 통한 혁신이고, 위기 극복의 리더십이며, ‘뉴 삼성’의 출발 아니겠는가? 더는 전문경영인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뒤로 숨어선 안 된다. 자신이 없다면, 더 늦기 전에 삼성을 위해 새 리더십을 찾아야 한다.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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