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년 전 고대 이집트 소설 ‘시누헤 이야기’ 원전 완역···“이집트인 정체성 탐구”

정원식 기자 2024. 6. 1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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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 박사(서울대 인문학 연구소 선임연구원)가 지난달 31일 경향신문사에서 최근 출간된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이준헌 기자

흔히 세계 최초의 소설로 언급되는 작품은 일본 헤이안 시대 궁녀 무라사키 시키부가 11세기에 쓴 <겐지 이야기>다. 이집트학에서는 ‘최초의 소설’이 이미 기원전에 나왔다고 본다. 이집트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기원전 1650년)에 속하는 기원전 1911~기원전 183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시누헤 이야기>가 그것이다.

지난달 출간된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휴머니스트)는 유성환 박사(54·서울대 인문학 연구소 선임연구원)가 고대 이집트어 원전을 직접 번역해 자세한 주석과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영어 중역본이나 어린이용 편역본으로 소개된 적은 있으나, 이집트어 원전 완역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유 박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가 있었다면 고대 이집트에는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가 있었다”면서 “<시누헤 이야기>는 문학적 재능을 지녔던 이름 모를 서기관이 창작한 고대 이집트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고 말했다.

<시누헤 이야기>는 아멘엠하트 1세(기원전 1985~1956년)와 그 뒤를 이은 센와세레트 1세(기원전 1956~1911)가 다스리던 시절의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다.

전쟁에 나선 왕세자(센와세레트 1세)를 수행하던 귀족 시누헤는 국왕 아멘엠하트 1세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탈영한다. 국경을 넘어 레체누(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도망친 시누헤는 그곳 족장의 신임을 얻고 족장의 딸과 결혼해 정착한다. 시누헤는 다른 족장의 도전까지 물리치고 부유한 삶을 누리지만 고국 이집트를 잊지 못한다. 이야기는 노년에 이른 시누헤가 마침내 센와세레트 1세의 사면을 받고 귀국하면서 끝난다.

“<시누헤 이야기>는 시누헤의 도주와 귀환의 서사를 통해 ‘왕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나와 신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날로 치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집트인으로서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고대 이집트의 다른 서사문학들과 차별화 되는 깊이와 문학성이 있습니다.”

<시누헤 이야기>는 ‘상형문자’로 알려진 고대 이집트의 성각문자(신성문자·hieroglyph)로 쓰여졌다. 성각문자는 고대 이집트어를 기록하는 데 사용된 문자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3250년 무렵 출현했다. 성각문자를 심하게 흘려 쓴 필기체를 신관문자라 부르는데, <시누헤 이야기>를 비롯한 중·후기 이집트어 서사문학과 종교문서, 실용문서는 대부분 신관문자로 작성됐다.

고대 이집트 신관문자. “귀족이자 고관, 아시아인의 땅에 자리한 폐하의 영지 담당관”이라는 뜻이다. 휴머니스트 제공

유 박사는 1999년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5년 간 통역사로 일했다. 통역사로 일하던 시절 프랑스 이집트학 학자이자 작가인 크리스티앙 자크가 쓴 소설 <람세스>와 교양서 <이집트 상형문자 이야기>를 읽은 게 고대 이집트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상형문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서울대 도서관과 아마존 등을 통해 입수한 고대 이집트어 관련 서적으로 문법을 독학했다.

문법과 달리 원전 텍스트를 읽는 건 독학으로는 불가능했다. 고대 근동(이집트·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 연구자들 10여명이 모여 한국고대근동학회를 창립한 게 불과 2년 전이다. 고대 이집트어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유학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집트 성각문자. 위키피디아

유 박사는 2005년 9월 미국 브라운대학교 이집트·아시리아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2012년 이집트 문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통역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있었고, 한 번 살고 가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걸 하자는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북미 지역에서 이집트학 박사학위 과정이 있는 대학은 10여곳에 불과하다. 이집트 문헌학 전공자는 그 중에서도 소수다. 이집트학과의 3분의 2는 고고학이나 예술사를 공부한다. 유학 시절 원전 독해 수업 수강생 수는 3명을 넘은 적이 없다. 덕분에 개인 교습에 가까운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어는 전기 이집트어, 중기 이집트어, 후기 이집트어, 데모틱어, 콥트어 등 다섯 단계의 변화를 거쳤습니다. 이집트 고고학 전공자라면 중기 이집트어 정도만 하면 돼요. 하지만 이집트 문헌학을 하려면 다 공부해야 합니다.” 이집트학과는 물론이고 고대 근동학과(이집트·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 등)도 없는 국내에서 고대 이집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연구자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고대 이집트 문자를 익히는 건 당대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서기관 지망생들은 6~7세에 서기관 양성소에 들어가서 10년쯤 공부했습니다. 공부의 방편으로 <시누헤 이야기> 같은 텍스트를 통째로 외우기도 했죠.”

원전 번역은 인문학 연구의 토대를 닦는 작업이다. 유 박사는 <시누헤 이야기>를 시작으로 <난파당한 선원>, <쿠푸왕과 마법사 이야기> 등 고대 이집트 서사문학과 교훈서들을 원전 번역할 계획이다.

“기본적인 텍스트를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번역하는 게 필요합니다. 원전 번역이 없으면 영어로 번역된 걸 봐야 하거든요. 고대 이집트어 원전 번역이 고대 근동학이나 성서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에게도 학문의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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