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성착취 필리핀 여성’에 배상” 유엔 권고에도 정부 “재심 보고 결정”

오세진 기자 2024. 6. 1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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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성매매 내몰린 필리핀 여성 3명
기소유예 처분…강제퇴거·구금명령
유엔, 피해자들에 ‘완전한 배상’ 권고
정부 “판결에 따라 조치” 계획서 제출
유흥업소 밀집 지역의 모습. 연합뉴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강제 성매매에 내몰렸던 필리핀 여성 3명을 인신매매 피해자로 보호하지 못한 한국 정부에 완전한 피해 배상(full reparation)을 권고했지만, 정부는 “(피해자들이 지난해 청구한 재심) 판결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세 여성들의 피해를 인정하지 않으며, 유엔 권고를 이행할 뜻이 없음을 내비친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유엔 여성차별위가 이 필리핀 여성들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권고한 것과 관련해, 법무부 등 관계부처의 입장을 종합한 이행계획서를 작성해 지난달 10일 유엔에 제출한 것으로 11일 확인됐다.

피해자들은 지난해 유엔의 권고를 근거로, 강제 성매매에 내몰렸음에도 강제퇴거·구금 명령을 내린 한국 정부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법원 판결(2020년 확정)에 대해 재심을 청구한 상태인데, 정부는 이 재판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구제 조치에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앞서 정부(법무부)는 피해자들이 청구한 재심 재판부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 결정이 어떤 법적 구속력 내지 영향력을 미치는지 의문”이라며 ‘각하’를 요청한 바 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김종철 변호사(공익인권법센터 어필)는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한 건 유엔 권고를 한국 정부가 이행할 계기를 제공한 것인데, 각하 의견을 냈다는 건 유엔 권고를 이행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지난달 10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한 이행보고서 내용 중 일부. 정부는 필리핀 여성 3명에게 ‘완전한 배상’을 제공하라는 권고에 대해 “(재심) 재판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답변했다. 한국 정부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한 이행보고서 갈무리

피해자들은 가수로 활동하기 위해 예술흥행(E-6) 비자를 받아 2014년 한국에 왔으나, 유흥업소 업주의 강요로 성매매를 하다 경찰 단속에 걸렸다. 이후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현 출입국·외국인청)에 45일간 구금된 뒤 강제퇴거 명령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성매매 혐의로 입건된 이들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했다. 법원은 검찰이 유흥업주가 피해자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이들이 제기한 강제퇴거 명령 취소 소송,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모두 기각한 바 있다.

하지만 유엔 여성차별철폐위는 지난해 10월 이들이 낸 진정 사건(2018년 접수)을 검토한 결과, 성매매 강요 피해를 인정하지 않은 수사기관과 법원 잘못을 지적하며 “대한민국이 강제 성매매를 당한 이들을 인신매매 피해자로 확인·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범법자로 대했다”고 판단했다. 여성들은 이를 근거로 지난해 강제퇴거·구금 명령을 내린 한국 정부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법원 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 바 있다.

피해자들은 강제퇴거 명령을 받은 상태라 현재 합법적 체류 자격 없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재심 재판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외국인의 경우, 법무부에 기타(G-1) 체류 자격을 신청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강제퇴거 집행이 이뤄질까봐 두려워 신청 자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 쪽에선 합법적으로 체류 신분이 보장된 가운데 재심을 진행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유엔이 여성차별철폐협약상 권리 침해 피해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권고한 만큼 정부가 자신들을 범법자로 대하면서 비롯된 모든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엔 총회가 2005년 국제인권협약이 보장하는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 구제를 위해 가입국이 해야 할 사항을 정한 원칙을 보면, 피해자를 권리 침해 이전 상황으로 회복시키는 조치와 금전 배상, 명예·권리 회복을 위한 사법적 결정이나 공식 사과 등 ‘완전하고 효과적인 배상’을 제공해야 한다고 돼 있다. 김 변호사는 “유엔 원칙에 비춰 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성매매 혐의에 대한)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고, 성매매를 강요한 유흥업주를 재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법무부는 이들이 국내 체류 허가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한겨레의 질문에 “체류 허가는 국내법 위반 여부와 제출 서류 등을 확인하고 심사해 결정하는 것”이라며 “허가 여부는 알려줄 수 없다”고만 말했다. 아울러 “이들은 2022년 2월부터 체류 기간 연장 허가를 신청하지 않고 불법체류 중”이라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

배상 여부에 대해서는 “이들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배해상 소송의 재심이 진행 중”이라며 “배상 여부는 법원 판단에 따라 검토돼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유흥업주에 대한 재수사 요구에 대해서도 “법무부는 개별 사건에 대한 수사 재기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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