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8할은[소소칼럼]
토끼 꿈을 꾸었다. 토끼 세 마리가 있고 그 중 한 마리는 새끼를 낳고 있는 꿈이었다. 해몽을 찾아보니 토끼가 새끼를 낳는 꿈은 재물이나 인연이 들어오는 길몽이라 했다. 로또를 한번 사 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토끼 꿈을 꾸고 로또를 샀더니 앞 숫자 두 개만 맞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는 어느 블로그를 보고 이번엔 그냥 운을 모으기로 했다. 하긴 토끼 하면 떠오르는 큰 귀나 커다란 앞니, 귀여운 앞발은 모두 두 개다.
실은 몇 달 전 꽤 오래 만난 연인과 헤어졌다. 이별 자체도 괴로웠지만, 엄마 생각을 하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겪었던 모든 이별의 끝에 엄마가 있었다. 어떤 때에는 밤새 나를 끌어안고 주무셨고, 어떤 때에는 차인 걸 찼다고 하는 거짓말에 말을 보태지 않으셨다. 당신한텐 한없이 무심한 딸이면서 이별에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엄마는 어떤 문장으로 이해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하루는 엄마의 휴대전화를 뒤적이다 몇 년 전 만났던 사람과 헤어진 날을 ‘우리 모두 슬픈 날’이라 메모해두신 걸 발견했다. 기어이 또 하나의 슬픈 날을 만들어 버린 나는 “이제 정말 아무 남자나 갖다 바치겠다”며 한 선배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사랑은 햇볕을 만난 4월의 화분 같은 것 아닐까. 우리 집에는 악독한 주인을 만나고도 여러 해 숨을 붙들고 있는 화분들이 있다. 냉해를 피해 겨우내 집안에서 키우는 동안 한없이 웃자라다가, 봄이 오면 베란다에서 햇볕을 만나 그 웃자란 몸으로 자꾸만 새 줄기를 내며 균형을 잃어가는 꼴이 참 우스우면서도 사랑스럽다. 그렇게 주렁주렁 잎을 달아버리면 결국 무거워서 꺾이고 말 텐데 그리도 좋을까. 지지대 없이 서 있기 어려운 내 화분은 ‘망한 수형(樹形) 대회’ 같은 걸 나가면 분명히 1등을 할 테고, 나는 그 상패를 평생 간직할 거다.
화분의 만개한 부분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보다 웃자란 부분을 가여워하는 마음이 사랑에 더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절에 왜 내가 없어서 너를 안아주지 못했을까, 시간마저 거스르는 분노야말로 사랑과 가장 닮아 있다고 믿는다. 생각해 보면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받는 마음의 8할은 가여움인 것 같다. 나도 당연히 못나고 삐딱한 구석들이 있다. 그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그것을 잘 감춘 날이 아니라 들켜버린 날 깊어졌다. 내게는 손톱을 망치는 오래된 버릇이 있는데, 이걸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걱정했지만 한 사람은 ‘내가 옆에 있는데도 여전하구나’ 하고 자신을 책망했다. 나는 이 말을 들은 날 정말이지 똑바로 살고 싶어졌었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8할은 가여움이다. 그의 약한 모습을 발견할 때면 누가 그걸 나보다 먼저 볼까봐 불안해지고, 그 결핍이 이 사람을 이만큼 살게 했다고 허공에 대고라도 변호하고 싶어진다. 이 마음이 동정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볼 때 나는 비로소 외사랑 중임을 안다. 당신보다 내가 더 가여워지는 어느 날 사랑은 끝난다.
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는 사람들과 만날 때 나는 몹시 어려운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사람은 책과 달라서 독해하려는 내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끝내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 또한 오만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잘 읽히는 책들을 여러번씩 읽고 싶다. 비 내리는 여름날 선풍기 앞에서도 읽고, 느릿느릿 밝아오는 크리스마스의 아침에도 읽고 싶다. 내가 당신을 마음껏 읽도록 내버려 둔다면, 당신이 아팠던 굽이굽이마다 4월에 피는 꽃을 심겠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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