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닥쳐서 바꾸니까 의심을 받는다 [정치에 속지 않기]

2024. 6. 1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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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을 바꿀 때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명분이 약할 때는 규정의 권위 자체가 약해진다.

여건 야건 규정 개정이 특정인과 묶여서 지적을 받는 것은 '급조'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한 정당의 대표직과 관련된 규정을 고치는데 미리 시간을 두고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닥치니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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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을 바꿀 때는 이유가 있다. 상황이 달라졌다는 게 가장 흔한 명분이다. 세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자주 나온다. 유연성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명분이 약할 때는 규정의 권위 자체가 약해진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 의심을 받는다.

여야 거대 정당이 규정을 고치려 하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에선 당대표를 포함해 지도부를 뽑는 방식을 고치자는 주장이 나왔다. 현재 국민의힘은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따로 뽑는다. 당대표 후보끼리 경쟁해 1명이 당대표가 되고, 최고위원 후보끼리 경쟁해서 복수의 최고위원이 뽑힌다. 당대표가 다른 최고위원들 위에 선다. 단일지도체제다.

집단지도체제라는 것도 있다.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한꺼번에 뽑는다. 1위가 대표가 되고 2위부터는 최고위원이다. 순위는 다르지만 권한은 비슷하다. 단일체제를 집단체로로 바꾸자는 얘기가 얼마 전부터 나왔다. 당대표에 집중된 권한을 줄이지는 거다.

국민의힘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왼쪽 두번째)이 지난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당헌당규개정특위 임명장 수여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4.6.4. 연합뉴스
그러더니 슬그머니 하이브리드 체제, 즉 2인 체제 주장이 등장했다. 당대표 후보 경쟁에서 1위가 대표, 2위가 부대표 혹은 수석최고위원이 된다. 다른 최고위원들은 기존 방식대로 뽑는다.

2인 체제에 대해 한동훈 전 위원장과 유승민 전 의원을 견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단박에 나왔다. 진단체제를 하려니 한 전 위원장부터 유 전 의원까지 지도부에 앉을 것 같아서 싫고, 현 단일체제를 유지하려니 한 전 위원장이 대표가 되서 강한 권한을 행사할 것이 걱정되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거다. 한 전 위원장이 1위가 되더라도 2위를 국민의힘 ‘주류’ 인사가 차지해 견제할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당권·대권 분리’ 규정을 바꾸기로 했다. 지금은 당대표가 대선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1년 전에 사퇴하도록 하고 있다. 공정한 대선 후보 경쟁을 위해서다. 민주당은 대선에 출마하려는 대표의 사퇴 시한을 당무위원회가 변경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기로 했다.

당초엔 ‘전국 단위 선거 일정이나 대통령 궐위 등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때’란 내용을 붙이려고 했는데, 이재명 대표를 위해, 또 지방선거 공천을 의식한 개정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찬반 논란이 커지자 ‘상당하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라고 수정했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이재명 대표 앞에 의사봉이 놓여 있다. 2024.6.10. 연합뉴스
하지만 이 대표를 위한 것이란 시선은 여전하다. 대선을 생각하는 이 대표가 만약 연임할 경우 현재 규정 대로라면 2026년 3월에 사퇴해야 한다. 3개월 뒤에는 지방선거가 열리고 공천에 관여할 명분이 약해진다.

여건 야건 규정 개정이 특정인과 묶여서 지적을 받는 것은 ‘급조’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당원들의 지지가 큰 한동훈, 여론의 지지가 상당한 유승민, 당대표 연임론이 강하게 나오는 이재명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한 정당의 대표직과 관련된 규정을 고치는데 미리 시간을 두고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닥치니까 하고 있다. 여당은 7월 말쯤 전당대회를 열어 당대표 뽑아야 하고 민주당에선 이 대표의 임기가 8월에 끝난다. 이러니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제도를 만드는, 위인설관(爲人設官)과 비슷한 위인설제(爲人設制)란 지적을 받는다.

이상훈 MBN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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