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인사이드] 법정에서 쓰러져 숨진 로펌 파트너, 4년 만에 ‘과로사 인정’ 판결

이현승 기자 2024. 6. 11. 09: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법조계 “근로자 범위·인과 관계 넓게 인정한 판단에 주목”

지난 2020년 6월 광주고등법원 법정에서 최종 변론을 하던 대형 로펌 파트너 A씨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결국 숨졌다. 사망 원인은 뇌출혈로 판정됐다.

이 사건은 A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를 다투는 소송으로 번졌다. A씨 유족은 지난 2022년 10월 “산업재해보상법에 따라 유족 급여와 장례비를 달라”는 취지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당시 유족은 “A씨가 극심한 과로와 스트레스를 겪은 상황에서 고도의 압박감과 긴장 속에 최종 변론을 하다가 병이 나 숨졌고 업무와 사망 간에 인과 관계가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달 23일 A씨 유족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A씨 사망 후 4년 만이고 유족이 소송을 내고 1년 7개월 만이다. 법조계에서는 “로펌 파트너 변호사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업무와 사망 간 인과 관계를 넓게 인정한 새로운 판결로 주목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광화문에서 출근하는 직장인. / 뉴스1

◇로펌 파트너도 근로자로 인정한 이유는?

로펌 파트너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기업 임원급으로 분류된다. 근로자가 아니라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014년 서울고등법원은 대형로펌 파트너 변호사는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당시 재판부는 “파트너 변호사가 로펌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더라도 사건 수임과 근무 시간에 있어 로펌의 관리·감독을 받지 않고 수입도 로펌 수익에서 분배받아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로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 서울행정법원은 “A씨는 로펌 파트너 변호사이지만 근로자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회사 주요 경영 사항을 결정하는 운영위원회에 속한 적이 없다는 점을 첫번째 이유로 들었다. 또 A씨가 자율적으로 수임할 사건을 결정하기보다 운영위에서 배당한 사건을 주로 담당했다는 점도 고려했다. A씨가 일정한 시간에 회사가 정한 사무실로 출근했고 매일 근무 내용과 시간을 사내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등 회사에 종속돼 근로를 제공했다고 봤다.

◇의사는 인과 관계 없다고 했는데 법원은 달리 본 까닭은?

업무상 재해와 사망 간에 인과 관계가 인정돼야 유족 급여와 장례비를 받을 수 있다. 인과 관계는 의사의 진단을 바탕으로 판사가 최종 판단하게 된다. A씨 사건에서는 의사의 진단 결과와 판사의 최종 판단이 서로 달랐다.

이 사건 감정의들은 ‘재판 변론 당시 특별한 감정 변화가 확인되지 않았고 돌발적인 상황이 없었다’, ‘A씨는 숙련된 변호사로서 높은 스트레스 저항성을 가졌다’는 취지의 감정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막연한 추측을 토대로 하는 것으로 A씨가 처했던 상황이나 업무 특성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반영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A씨가 과도한 업무로 신체적인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고 부정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노출돼 있었다”고 봤다.

이렇게 판단한 이유로 A씨가 평소 혈압, 체중 등 건강지표가 정상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않았는데 갑자기 뇌동맥류가 악화된 점을 들었다. 당초 1,2심에서 승소했던 사건이 대법원에서 패소 취지로 파기되고, 항소심 판결 선고를 앞둔 단계에서 중요 사건에서 배제되는 등 부정적인 상황이 연속된 점도 감안했다.

◇공단이 인정한 업무시간보다 10시간 더 일했다고 본 근거는?

법원은 A씨가 사망 전 1주일 간 약 59시간 일했다는 유족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봤다. 이는 공단이 인정한 시간(49시간)보다 10시간 정도 많다. 공단은 A씨가 사무실에 최초 입실한 시간, 저녁에 최종 입실한 시간을 기준으로 업무시간을 산정했다.

재판부는 “저녁 사무실에 최종 입실한 시간을 퇴근시간으로 삼는 것은 실제 근무시간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공단이 산정한 A씨 근무시간은 타임시트상 업무 수행시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타임시트는 변호사들이 고객에게 수임료를 청구하기 위해 작성하는 근무시간이다. 통상 수임료는 시간당 보수에 근무시간을 곱해 산정된다. 타임시트에는 사무실에서 근무한 시간 뿐 아니라, 회의·서면 작성·재판 출석 등에 쓴 시간도 포함된다.

법원은 “타임시트는 변호사의 업무 수행능력과 능률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이를 잘못 기재할 경우 자칫 고객 항의를 받을 수 있어 그 정확성이 상당히 보장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어 “A씨는 발병 전 1주일 동안 그 이전 12주간의 주당 평균 업무시간보다 30% 이상 더 많이 근무할 정도로 상당히 과로했다”고 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