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1 현장] 두려울 게 없다는 김판곤 감독의 격정 토로, "뭔가 이룰 때마다 부정적 감정이 들었다"
(베스트 일레븐=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격정적이었지만 솔직한 감정을 가득 실은 답변이었다. 아마도 말레이시아 팬들이나 미디어들이 생각해보지 못했을, 그들이 고용한 감독이 느끼는 압박과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알리는 코멘트이지 않았나 싶다. 바로 김판곤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강했던 메시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김 감독이 이끄는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오늘(11일) 밤 9시(한국 시각) 쿠알라룸푸르 부킷 잘릴 국립경기장에서 예정된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D그룹 최종 라운드 대만전을 치른다. 김 감독은 핵심 미드필더 파울루 조수에와 더불어 10일 페탈랑 자야에 위치한 말레이시아축구협회(FAM) 본부 강당에서 대만전을 위한 사전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이 자리를 찾은 <베스트 일레븐>으로부터 외국인 지도자로서 말레이시아를 이끌면서 느끼는 압박감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여기서 한국 기자를 만나서 반갑다"라고 웃으며 답을 시작한 김 감독이지만, 그가 쏟아내는 말은 마디마디마다 뼈가 있었다.
김 감독은 "압박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크다"라고 운을 뗀 후, "제 생각에 우리 코칭스태프는 이곳에서 좋은 성과를 많이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철학을 바꾸고 국가대표팀의 특성을 확립했으며, 홈 경기 승률은 이전보다 훨씬 좋다. 우리는 40년 만에 자력으로 AFC 아시안컵 본선에 진출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순간까지 월드컵에 도전하고 있다"라며 자신이 부임한 후 성취한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지만 "이런 환경을 이 나라에 제공했지만, 때로는 더 많은 압박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다"라며 "처음 말레이시아에 왔을 때 아주 좋은 지원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응원해주었으며, 제가 요청한 모든 것들이 제공됐다. 하지만 제가 무언가를 성취할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더라. 이게 제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김 감독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싸울 것"이라며 "우리는 절대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저는 두려워할 게 없다. 이 팀에 커다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성취를 못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전진할 것"이라며 앞만 보고 팀을 이끌어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 감독이 공식 석상에서 쏟아낸 이런 발언 안에는 꽤 강력한 항의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유추된다. 김 감독은 이번 6월 2차 예선 2연전을 준비하면서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먼저 2연전을 앞두고 리그 일정이 없어 조기 소집으로 선수들을 담금질하려고 했으나, 국가대표 선수들을 상당수 보유한 리그 선두와 2위 팀인 조호르 다룰 탁짐과 셀랑고르 FC가 FIFA 국가대표 의무 차출 규정에 맞춰 보내주겠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이중 조호르 다룰 탁짐의 경우, 이번 소집뿐만 아니라 항상 김 감독의 선수 차출에 비협조적이었다. 이를 두고 말레이시아 현지 기자들은 현행 말레이시아축구협회 집행부와 김 감독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몽니를 부리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조호를 다룰 탁짐의 구단주가 말레이시아축구협회의 전임 회장이었다.
전세기편으로 쿠알라룸푸르와 키르키스스탄 비슈케크를 빠르게 오간다는 계획도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원정 경기를 마치고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오는데 들인 시간이 무려 23시간이다. 가히 유럽 원정을 다녀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가뜩이나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인 김 감독으로서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김 감독을 향한 현지 미디어와 팬들의 기대치가 한국에서 아는 것과 달리 확 바뀌어있다는 점이 그를 힘 빠지게 한다. 2023 AFC 카타르 아시안컵 때도 사실 납득이 되지 않은 점이 많았다.
말레이시아는 당시 카타르 아시안컵에 출전한 24개 팀 중 인도네시아와 더불어 FIFA 랭킹에서 가장 하위 랭크된 팀이었다. 정확히는 뒤에서 두 번째였다. 요르단·바레인과 대결에서 연거푸 패하며 탈락이 확정되자 비난 여론이 일었는데,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후보 한국을 상대로 3-3 무승부를 연출하자 급히 '명장'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곰곰 기억을 떠올려보니 그 결과가 마음에 안 드는 이도 있었다. 당시 한국전이 끝난 후 한 말레이시아 기자는 평소 유지하던 블랙 컬러가 아닌 옷을 입고 나온 이유가 무엇이냐는 생뚱맞은 트집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3월 2차 예선 D그룹 선두 오만과 2연전에서 연거푸 패하자 다시금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객관적으로 오만은 D그룹에서 가장 높은 FIFA 랭킹을 자랑하는 톱 시드이자, 종종 한국이나 일본의 발목을 잡는 아시아 무대의 다크호스로 유명한 강자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최근 동남아 국가들은 도리어 한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권보다는 유독 중동 팀에 힘을 못 쓰고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최근 그 기세가 대단하던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도 중동의 이라크에 그렇게 당했다.
제3자의 눈으로 볼 때, 말레이시아 처지에서는 객관적 전력상 오만과의 지난 두 경기는 승점 1점만 따내어도 좋을 결과이며 전패를 당해도 예상했던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 두 경기에서 패하고 순위가 3위로 급락하자 우려와 비난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현지에서 피부로 접하는 대만전을 앞두고 있는 김 감독을 향한 시선에는 기대보다는 절망하는 기색이 더 크게 느껴진다. 대만을 그냥 이기는 것도 모자라 최소 7골을 넣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 때문이다. 오만이 키르키스스탄과 홈 경기에서 되도록 대량 득점하며 부담을 덜어주면 다행이지만, 아무리 약체라도 대만에게서 7골을 이끌어내는 게 과연 쉬운 일이냐는 게 그들의 전망이다.
하지만 김 감독은 10일 저녁 대만전 대비 최종 훈련을 마친 후 <베스트 일레븐>과 짤막하게 나눈 대화에서 "축구에는 불가능이 없다"라며 한 번 두고 보라고 응수했다. 물론 굉장히 많은 골이 필요한 경기라, 전술적으로 다소 무리하는 걸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김 감독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김 감독을 향한 시선은 또 한 번 반전될 것이다.
글=김태석 기자(ktsek77@soccerbest11.co.kr)
사진=말레이시아축구협회(F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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