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지나도 ‘일부만 더 나은 삶’…남아공의 미래는?
인종분리정책 폐지 30주년, 정치권 부패·인종불평등 심화
2024년 5월29일 치러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총선 결과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넬슨 만델라’의 정당인 ANC가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한 건 흑인 유권자도 투표 참여가 가능해진 1994년 4월 총선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했던 ANC의 집권 30년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일 터다.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 폐지 30주년을 맞은 남아공이 다시 기로에 선 모양새다.
넬슨 만델라 정당의 추락
남아공 선거관리위원회가 6월2일 발표한 총선 결과를 종합하면, ANC는 40.18%의 득표율로 전체 400석 가운데 15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앞선 2019년 총선 때 ANC는 57.50%를 득표해 230석을 확보한 바 있다. 5년 만에 득표율은 17%포인트, 의석은 71석을 잃었다. 원내 제1당 지위는 유지했지만, ‘재난적 결과’란 평가를 피할 수 없다.
1999년 총선 때부터 꾸준히 제1야당 지위를 유지해온 중도보수 성향의 민주동맹(DA)은 2019년 선거 때보다 1%포인트 남짓 오른 21.81%를 득표하며 3석 늘어난 87석을 얻었다. 일약 원내 제3당으로 떠오른 움콘토위시즈웨(MK·줄루족 말로 ‘민족의 창’이란 뜻)는 ANC 소속으로 남아공 대통령(2009~2018년)을 지낸 제이컵 주마가 2023년 12월 창당한 신생 정당이다. MK는 14.59%의 득표율로 58석을 확보했다. ‘캐스팅보트’를 거머쥔 셈이다. 당내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다 출당된 줄리어스 말레마 전 ANC 청년연맹 대표가 2013년 창당한 경제자유전사(EFF)는 원내 제4당으로 밀렸다. EFF는 2019년 선거 때보다 1%포인트 남짓 떨어진 9.51%를 득표해 5석 줄어든 39석을 얻었다.
선거 이전부터 ANC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30년 세월이 지났지만, 기대와 달리 남아공 국민의 삶이 별반 나아지지 않은 탓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이 2023년 11월 펴낸 ‘포용을 통한 성장’ 보고서를 보면, 남아공 경제는 1994~2008년 연평균 3.6%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세계적 금융위기 속에 마이너스 성장을 한 2009년 이후 경제성장률 지체가 장기간 이어졌다. 실제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기 이전까지 5년간 남아공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0.7%에 그쳤다.
백인 가구 월평균 소득, 흑인 가구 10배 넘어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으로 성장률은 떨어지고, 국가부채는 늘어만 갔다. 2008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3.6%였던 남아공의 국가부채 비율은 2022년 71.1%까지 치솟았다. 불과 15년 만에 무려 47.5%포인트나 부채 비율이 높아지면서, 국가 신인도는 ‘투자 부적격 등급’까지 떨어졌다. 2022년 GDP의 4.8%, 정부 총수입의 17%를 이자로 지불하게 되면서 재정 압박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 결과는 전력·상하수도·도로·항만·철도·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의 노후화로 이어졌다. 툭하면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 현상은 이번 선거 최대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경기침체는 실업률 상승으로 이어졌다. 1994년 20%였던 실업률은 지난 30년 세월 연평균 0.5%포인트씩 높아지면서 2022년 33.5%까지 높아졌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61.5%를 기록해 ‘세계 최악’이란 오명까지 얻었다. 불평등도 더욱 심각해졌다. 2022년 세계은행이 낸 보고서를 보면, 남아공 상위 10% 인구가 총자산의 80.6%를 보유하고 있다. 지니계수(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 소득분배가 평등하면 0에 가깝고, 불평등하면 1에 가까워짐)는 한국(0.32)의 2배가 넘는 0.67을 기록했다. 세계 최악이다.
인종에 따른 불평등도 여전하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20주년이던 2014년 발표된 자료를 보면, 흑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552달러에 그친 반면 백인 가구는 6138달러를 기록했다. 2023년 5월 남아공 통계청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흑인 인구의 실업률은 40%에 이르렀지만 백인은 7.5%에 그쳤다. 1994년 당시 흑인과 백인 인구의 실업률은 각각 25%와 4%였다. 남아공 고용노동부가 2023년 펴낸 연례 ‘고용평등 보고서’를 보면, 고용 가능 인구의 80%에 달하는 흑인 가운데 경영·관리직 간부는 16.9%에 그친 반면, 고용 가능 인구의 8%에 불과한 백인은 전체 간부직의 62.9%를 차지했다. 흑인 유권자층에서 집권 30주년을 맞은 ANC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백인의 정당에 손 내민 라마포사 대통령
남아공은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 다수당이 대통령을 배출하는 구조다. 선거에서 참패했음에도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연임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연정 협상 대상으로 ANC와 지지기반이 겹치는 MK나 EFF가 아닌 ‘백인의 정당’인 DA 쪽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현지 매체 <메일앤드가디언>은 6월2일 ANC 고위 관계자의 말을 따 “라마포사 대통령이 정부는 ANC가, 의회는 DA가 맡는 식으로 연정을 꾸리려 한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DA와 연정을 추진하면 지지기반이 붕괴될 것이란 우려가 ANC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DA와 연정이 성사되면 ANC 지지층 상당수가 이탈해 MK나 EFF 쪽으로 흡수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MK를 이끄는 주마 전 대통령은 집권 이전부터 성추문과 부패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2018년 당 안팎의 압박 속에 임기를 마치지 않고 자진 사임한 직후부터 대통령직을 승계한 라마포사 당시 부통령에 대한 정치 공세를 이어온 터다. 선거를 앞두고 외국인혐오증까지 부추겼던 MK 쪽은 연정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라마포사 대통령 사임을 내걸었다.
반면 EFF 쪽은 전제 조건 없이 협상에 나설 뜻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불평등 문제를 선거 쟁점으로 삼은 EFF는 기간산업 국유화와 토지 무상몰수·분배 등을 주장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에도 남아공 토지 절대다수는 백인 농장주가 소유하고 있어서다. 1996년 개정된 남아공 헌법 제25조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률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재산을 박탈당해선 안 되며, 어떤 법률도 임의로 재산 박탈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다. EFF와 MK는 이 조항을 바꾸는 개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A는 적극 반대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기업의 성장과 노동자들의 사망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노동법 전문 변호사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라마포사 대통령은 한때 한국의 민주노총, 브라질의 통일노동자연맹(CUT)과 함께 ‘세계 3대 노동조합’으로 꼽힌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COSATU) 초대 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1994년 의회에 진출한 뒤 헌법제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한때 ‘만델라의 후계자’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이 후계자로 확정된 직후인 1996년 그는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투자 전문 지주회사 샨두카 그룹을 창설해 광물·에너지·부동산·보험·통신사 등을 거느린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가 주마 전 대통령 집권 2기의 부통령으로 정계에 복귀한 2014년 산두카 그룹의 시가총액은 200억랜드(약 1조4530억원)까지 치솟았다. 현지 매체 <선데이타임스>는 2012년 9월16일치에서 “라마포사 대통령이 보유한 자산은 31억랜드(약 2250억원)로 남아공에서 13번째 부자”라고 평가했다.
그가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던 시절에도 남아공 노동자들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 그가 창설을 주도했던 전국탄광노동조합(NUM)은 2012년 8월 남아공 북서부 마리카나 지역에서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다국적 광물업체 론민이 운영하는 백금(플래티넘) 광산에서 파업에 나섰다. 그해 8월 16일 경찰이 파업 노동자 강제 해산에 나섰다. 경찰은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노동자들의 등 뒤에서 반자동소총을 난사했다. 노동자 34명이 숨지고, 78명이 다쳤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발생한 최악의 유혈극인 ‘마리카나 학살’이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당시 론민 이사회의 일원이었고, 경찰의 진압 작전에 앞서 ‘강경 대응론’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NUM 쪽도 당시 파업 노동자 지원을 위한 중재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가 ‘일부에게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준 셈이다.
“ANC와 DA의 연립정부 구성에 단연코 반대한다.” ANC의 주요 지지기반인 COSATU 쪽은 6월5일 성명을 내어 이렇게 밝혔다. COSATU는 “DA는 최저임금제와 전 국민 의료보험에도 반대하며, 되레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정당”이라며 “ANC-DA 연정은 남아공 노동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ANC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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