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보다 급한 일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4. 6. 11. 07:05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오는 17일 무기한 집단 휴진을 결정했다.

비슷한 시기에 일제 휴진에 돌입한다면 동네의원부터 대형병원까지 한국 의료가 멈춰 설 것이다.

지난 3일 대통령이 직접 포항 영일만 일대에 석유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한 뒤로 조사를 시작한 배경과 성공 가능성은 물론, 심해 기술평가 기업 '액트지오'는 믿을 수 있는 회사인지, 5000억원이라는 돈을 들여 시추에 나서는 것이 옳은 결정인지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연합뉴스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오는 17일 무기한 집단 휴진을 결정했다. 소위 ‘빅5’를 비롯한 대형병원들 역시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20일 집단 휴진 계획을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에 일제 휴진에 돌입한다면 동네의원부터 대형병원까지 한국 의료가 멈춰 설 것이다. 환자들의 위기감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질병이나 사고가 날짜를 정해놓고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 건강한 사람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다. 하필 그날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심장발작이라도 겪는다면 어쩔 것인가?

내 눈엔 이보다 급한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석유 시추 소식이 모든 지면을 뒤덮는다. 지난 3일 대통령이 직접 포항 영일만 일대에 석유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한 뒤로 조사를 시작한 배경과 성공 가능성은 물론, 심해 기술평가 기업 ‘액트지오’는 믿을 수 있는 회사인지, 5000억원이라는 돈을 들여 시추에 나서는 것이 옳은 결정인지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두가지 사건을 바라보는 심경은 착잡하다. 논란만 클 뿐 최소한의 합리성·과학성이 없기 때문이다. 의대 증원 문제는 벌써 4개월을 끌고 있지만, 의료계 밖에서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이를 거의 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정부에서 주장하는 ‘2000명’이라는 숫자에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학적이란, 사물과 현상의 원리에 의문을 품고, 정보를 모아 가설을 세우고, 관찰과 실험 등을 통해 증거를 축적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이렇다. 정부와 의료계가 만나 소위 ‘필수의료’ 인력이 왜 부족해졌는지 따져본다. 증원으로 해결할 문제인지, 다른 조치가 필요한지 판단한다. 증원이 필요하다면 향후 의사가 얼마나 부족할 것인지, 현재 의학 교육의 인적·물적 자원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는 얼마인지 산정한다. 5~10년 계획을 세워 추진한다. 각 단계마다 수집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대중의 의견을 수렴한다. 이렇게 하면 사회의 실력이 한단계 성숙해, 향후 다른 의료 문제가 생겨도 의사결정이 빠르고 정확해질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절차 중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이번 사태의 분수령은 5월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의료계의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한 것이다. 재판부는 의료개혁이 “공공복리에 해당한다”면서도 “2000명이란 수치의 근거는 특별한 게 없다”고 지적했다. 인용 판결이 났다면 어땠을지 두고두고 아쉽다. 입장 곤란해진 정부에 한걸음 물러설 여지를 주면서, 의료계의 진료 공백도 어느 정도 완화되지 않았을까? 근거 없는 정책적 판단과 통치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원칙이 천명되면서, 우리에게 맞는 의료가 무엇인지 과학적 논의를 시작할 계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석유 얘기도 근거가 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성공률이 ‘20%’라고 하자 어느 신문은 다섯번만 시추하면 될 높은 확률이라고 보도해 수학의 기본도 모른다는 빈축을 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20%라는 수치가 과연 맞는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일 것이다. 이렇듯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근거를 밝히지 않으니, 알맹이 있는 논쟁이 가능할 리 없다. 사실을 바탕으로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귀를 막은 채 자기가 믿는 것만 외쳐댄다. 갈등은 점점 심해져 무슨 일에든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데, 양쪽 모두 허깨비를 붙잡고 싸우는 것이라 무엇 하나 의미 있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권력이란 곧 의제를 설정하는 능력이다. 나쁜 권력은 중요한 의제를 무시하고 덜 중요한 의제를 부각해 허물을 덮는다. 여기까지는 책에 나오는 얘긴데, 살다 보니 더 나쁜 권력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쁜 의제를 꺼내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놓고, 수습할 의지도 능력도 없으니 엉뚱한 의제를 꺼내는 것이다. 열흘 남았다. 당장 국민의 생명이 달린 의료 문제부터 매듭짓자. 5000년간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석유는 그다음에 파내도 늦지 않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