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삭제한’ 또 다른 여성 [기자의 추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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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분야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1쇄를 소중히 여긴다.
1951년, 18개국에서 온 각국의 최고 엘리트 여성 21명이 한국전쟁 진상조사를 위해 유서까지 미리 쓰고 보낸 약 열흘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인데.
그동안 학문적 검토의 필요성조차 없는 정치선전물로 여겼던 소책자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동안 "냉전이 이 여성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완전히 삭제해버리려" 했다는 점을 촘촘히 짚어내고 그 의미와 중요성을 밝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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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지음
창비 펴냄
사회과학 분야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1쇄를 소중히 여긴다. 당장 읽지 않아도 쟁여야 한다. 1쇄를 마지막으로 절판되는 책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냉전의 마녀들〉 역시 그런 마음으로 ‘무지성 구매’한 책 중 한 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정말 좋아하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1951년, 18개국에서 온 각국의 최고 엘리트 여성 21명이 한국전쟁 진상조사를 위해 유서까지 미리 쓰고 보낸 약 열흘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인데. ‘국제민주여성연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단체였고, 무엇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성들이라는 점이 마음을 한껏 부풀게 했다. 전쟁 서사란 주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으니까.
경기 용인의 한 동네서점과 4월 총선 이후 민주주의를 주제로 북클럽을 시작하며 〈냉전의 마녀들〉을 필독서 목록에 포함했다. 독서 리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절판된 책 몇 권을 제외해야 했고, 이 책 역시 막판에 위기를 겪었다. “출판사에서 재고가 스무 권밖에 안 남았다고 하더라고요….” 서점원이 북클럽 멤버들에게 보낼 책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출판사는 고심에 빠진다. 그러고 나서 감사하게도 재쇄를 결정해주었다. ‘좋은 책을 우리가 살렸다’고 함께 기뻐하고 나니 이 책을 더 널리 알려야겠다는 사명감도 생긴다.
〈냉전의 마녀들〉은 조사위원회가 방북을 마친 후 8개국 언어로 발행한 소책자 〈우리는 고발한다(We Accuse)〉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한국전쟁기 북한 지역 전쟁 실태를 조사한 최초의 외부 조사단이라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 학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동안 학문적 검토의 필요성조차 없는 정치선전물로 여겼던 소책자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동안 “냉전이 이 여성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완전히 삭제해버리려” 했다는 점을 촘촘히 짚어내고 그 의미와 중요성을 밝혀낸다. 저자가 새롭게 낸 길을 따라가는 일은 모험담처럼 흥미진진한 동시에 마음이 미어질 것처럼 아프기도 하다.
남북한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고 ‘종전 선언’ 이야기가 나온 게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적으로 전쟁을 생각해야 하는 시절이 되고 보니 〈냉전의 마녀들〉이 남긴 질문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전쟁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의 질문은 한 가지였다. “전쟁이 언제 끝날까요?” 한국은 지금도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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