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금융 아닌 제조업체 밸류업은 언제 나오나요

정민하 기자 2024. 6. 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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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세는 대기업, 이른바 재벌만 신경 쓰는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경제 규모가 빠르게 커졌던 지난 24년간 한 번도 바뀌지 않았고, 이 때문에 상속세는 중소기업마저 해당하는 문제가 됐습니다. 경영 승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금융업종만 기업 밸류업(가치 상승)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오랜만에 은행·증권사 등 금융업종이 아닌 한 제조업체 관계자를 만나 “밸류업 프로그램 참여는 언제 하냐”고 묻자 돌아온 말이다. 주가 상승을 원하지 않는 기업 오너는 금융당국이 계속 밸류업 참여를 독려한다고 한들, 동참할 생각이 없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지분 가치가 크면 상속세 부담이 커지고, 세금을 내는 과정에서 지분 매각이나 주식담보대출을 실행해야 한다. 이 과정 자체가 주가가 떨어질 이슈뿐이다.

실제로 밸류업에 동참하겠다는 비금융사는 없다. 지난달 27일 밸류업 가이드라인 시행 이후 핵심 방안인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를 단행한 상장사는 총 3곳이지만 모두 금융사다. 은행 대장주 KB금융지주가 지난달 27일 오는 4분기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한다는 예고 공시를 올렸다. 28일엔 주주환원에 앞장서 온 키움증권이 본 공시로는 ‘1호’가 됐고, 31일엔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코스닥 상장사 중 처음으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개했다.

출발 깃발이 흔들어졌지만, 그다음 타자가 안 보인다. 주요 대기업이 앞장서야 이를 기준으로 다른 크고 작은 기업도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나, 대부분 대기업은 소극적인 모습이다. 삼성·SK·롯데·한화 등 대기업조차 정부의 세제 지원 등 인센티브 제공 여부가 불확실해 눈치만 보고 있다.

기업 관계자들은 밸류업에 나서기에는 상속에 부담이 너무 크다고 기회될 때마다 이야기한다. 상장사 오너는 주가 상승이 부담스럽고 이 때문에 투자자들이 떠나고 있으며, 투자자가 없으니 상장사는 자금 조달에 나서기 어렵다. 투자한다는 사람이 없으니 기업은 기껏해야 물적분할 후 재상장밖에는 답이 없고, 이로 인해 주가는 더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한국은 상속세 최고세율이 50%로 대기업의 경우 최대 주주 할증까지 더해져 상속세율이 60%에 육박하게 된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중견·중소기업도 영향권에 들어왔다. 중소기업중앙회가 2022년 업력 10년 이상의 중소기업 600개사를 대상으로 가업승계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 중 76.3%가 가업승계 과정에서 예상되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막대한 조세 부담 우려’를 들었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경영 승계 대신 사모펀드 등에 경영권을 넘기거나, 상속·증여세가 없는 싱가포르 같은 나라로 이민 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면서 “그나마 가업을 이어가려는 곳은 회계장부상 부동산 가치를 낮게 유지하는 등 편법으로 주가를 누르고 있다. 승계하려면 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일단 의지를 보이고 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상속세는 최대 주주 할증평가 폐지, 가업상속공제 대상·한도 확대, 밸류업 기업만 가업상속공제 폭 확대 등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며 “6월부터 공청회나 의견 수렴 절차 등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최 부총리가 최대 주주 할증평가 폐지를 거론한 것은 처음이다.

문제는 국회다. 세법 개정안은 정부가 7월 말쯤 개정안을 발표하면, 이후 국회 논의를 거쳐 확정된다. 그러나 22대 국회는 300석 중 171석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의 동의없인 세법 개정이 불가능하다. 민주당 등 야당은 여전히 상속세 완화를 부자 감세로만 인식하고 있다.

부자 감세, 그 지적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저성장과 인구 감소, 산업 경쟁력 약화가 훨씬 더 심각하다. 자본시장을 일으켜 세워야 그곳에서 기업이 적정 가치에 자금을 조달해 해외 시장이라도 개척할 수 있다. 예전보다 많이 줄긴 했지만, 국민 노후자금도 상당액이 국내 주식에 물려 있다. 한국 주식 저평가를 해소하고 자본시장을 바로 세우려는 방향에 민주당이 동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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