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이젠 지겹다. 못참겠다"…극우에 표던진 프랑스·독일
민생고 해결 못한 정부 무능에 표심 등돌려
(파리·베를린=연합뉴스) 송진원 김계연 특파원 = "이젠 지겹다는 거예요. 더는 못 참겠다는 불만을 표현한 거죠."
프랑스에선 극우 정당의 압승으로 끝난 유럽의회 선거 결과에 대해 "예견된 결과"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전날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의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은 31.5%를 득표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집권 여당 르네상스(14.6%)를 더블 스코어로 눌렀다.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크롱 대통령과 RN의 마린 르펜 후보가 맞붙었을 때만 해도 프랑스인들은 '극우 르펜만은 안 된다'는 공감대로 결집해 마크롱 대통령을 '연임시켜 줬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드러났듯 이제 적극적으로 극우 정당에 표를 던지고 있다.
파리 시민 파우치 씨도 그중 하나다.
"RN은 기존 정당들이 외면하는 중요한 문제들, 즉 사회 불안정이나 대규모 이민, 이슬람 문제를 유일하게 언급하는 정당이죠."
RN은 프랑스로 몰려드는 이민자가 사회 문제와 불안을 야기한다며 국경 통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50대 프랑스 여성도 "길거리를 둘러보라. 거리 곳곳에 노숙자가 넘쳐나고 강도, 절도, 강간이 벌어지고 있다"며 "극우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런 상황이 잘 통제되지 않는다는데 불만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이들 이민자를 지원하는 것도 불만"이라고 덧붙였다.
나아질 기미가 없는 민생고도 프랑스인이 점점 극단을 좇는 이유 중 하나다.
파우치 씨는 "RN 지지자 사이에선 계층 하락과 버림받았다는 강한 느낌이 있다. 주택 소유의 어려움, 이전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한다는 인식, 공공 서비스 접근 차단 등이 그렇다"며 "이런 점들이 비수도권 지역에서 RN의 강한 상승세를 설명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건물 경비원으로 일하는 50대 남성도 "모든 물가가 다 올랐다. 버스비도 올림픽을 앞두고 5유로(7천300원)까지 오를 것이고 정육점에 가서 고기 1㎏은 전보다 비싼 25유로(약 3만6천원)를 줘야 한다"며 "그런데 월급은 그 수준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불평했다.
이들에게 극우의 주장은 속 시원한 '사이다'였던 셈이다.
극우의 인기 저변엔 마크롱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좌절감이 깔려 있다. 집권 7년 동안 서민 생활이 나아진 게 없다는 것이다.
이번 투표에서 기권했다는 마누엘(49) 씨는 "사람들은 기대를 걸고 마크롱에게 투표했지만 우리 얘기가 통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며 "좌파, 우파, 중도 다 찍어봤지만 모두 마음에 안 드니 극단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RN의 '프랑스 우선주의'도 지지자를 끌어모은 요인이다.
극우 성향이라고 밝힌 버스 운전기사 세바스티앙(50) 씨는 "지금 정부에선 유럽연합(EU)이 우선이다 보니 너무 규제가 많다. 국경도 다 열려 있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며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는데 오히려 우크라이나나 몰도바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파우치 씨도 "프랑스가 EU에 점점 통합되는 것이 우리의 주권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RN은 이런 불만을 예리하게 간파해 이번 선거에서 EU의 권한을 축소하고 프랑스법이 EU 법보다 우선하도록 법적 체계를 재정비하겠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기업과 노동자,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강화하겠다는 공약도 내세웠다.
독일에서도 극우 세력인 독일대안당(AfD)이 15.9%를 득표하며 선전했다.
AfD는 올해 초 이주민 수백만 명을 외국으로 추방한다는 이른바 '마스터플랜' 스캔들로 대규모 반대 시위를 촉발했다. 그러나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우리나라 먼저'라는 구호를 여전히 내세우며 목표였던 득표율 2위 달성에 성공했다.
독일인들은 난민 포용을 비롯한 정부 정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쉬운 언어'로 파고든 점을 극우가 득세하는 이유로 꼽았다.
독일 서부 에센의 에너지업체에서 일하는 플로리안(27) 씨는 "10년쯤 전부터 시리아 등지에서 온 난민을 많이 받아들였다. AfD는 논쟁 과정에서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코로나19 봉쇄 논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또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부터 친기업 성향 중도우파 자유민주당(FDP)까지 스펙트럼이 폭넓은 정당이 연정을 구성한 탓에 현안에 신속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점도 집권 세력 참패의 원인으로 봤다.
난민 정책과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 위기 대응 등 대부분 쟁점에서 AfD와 대척점에 있는 녹색당은 지지율이 2019년 유럽의회 선거 때 20.5%에서 5년 사이 11.9%로 거의 반토막 났다.
녹색당을 지지한다는 플로리안 씨는 "지난번 유럽의회 선거와 총선 때 기후 위기와 에너지 이슈가 부각되면서 녹색당이 선전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정상으로 돌아갔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프랑스나 독일의 극우 바람은 정치적 반대편에서 볼 땐 불안한 신호다.
한 60대 프랑스 여성은 유럽의회 선거에 관해 묻고자 한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끔찍한 결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RN은 나라를 운영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말은 그럴싸하지만 RN은 그저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좌파 지지자라는 시몽(35) 씨 역시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라며 "그들이 국회 다수당을 차지하거나 나라를 운영하게 된다면 프랑스에 수치"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당신도 외국인이니 RN 지지자들에게 질문하면 솔직한 답변을 듣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특히 이주 배경을 지닌 이들은 극우가 위세를 떨치는 데 대해 공포에 가까운 불안을 호소했다.
베를린에서 클럽 디제이로 일한다는 아르헨티나 출신 옥타비오(30) 씨는 "AfD 득표율 16%는 꽤 무서운 수치다. 민주적이고 진보적이라는 독일의 이미지와 달리 아직도 신나치주의자들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민자가 많은 베를린에서도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을 많이 겪는다. 외국인을 많이 접하지 못한 바이에른주 같은 지역은 가기에도 겁난다"며 "AfD를 법으로 해산하는 데는 반대하지만 더 강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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