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등기 덫' 가해자 겨우 찾았지만... 전세사기 피해자는 한숨만
가등기권자 누군가 봤더니
전세사기 주범 아들 고교 동창
"HUG도 가등기 주택은 낙찰 안 받아"
가등기가 전세사기에 악용됐다는 사실이 본보 보도로 드러난 뒤 정부도 제도 개선을 약속했지만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정작 피해 구제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가등기 덫을 놓은 전세사기 일당을 찾는 데 성공한 한 피해자는 여전히 문제 해결까지 갈 길이 멀다고 증언한다. 전세사기 피해자(임차인)를 대신해 강제경매에 나선 주택도시보증공사(HUG)도 가등기 탓에 보증금 회수에 애를 먹고 있다.
가등기권자 찾아 삼만리, 겨우 찾았는데…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빌라에 살고 있는 김모씨는 집주인에게 전세금 1억9,0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한 전세사기 피해자다. 집주인은 전세사기 조직이 이름만 걸어 둔 바지 집주인(A씨)이었고, 실제 집주인(B씨)은 대규모 전세사기를 일으켜 현재 법정 구속된 상태다.
김씨는 애초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경매로 낙찰받을 계획이었다. 전세사기특별법에 따른 피해자로 인정받은 터라 우선매수권으로 '셀프 낙찰'받는 게 가장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 희망은 이내 물거품이 됐다. 김씨가 전입한 후 C씨라는 사람이 김씨 집에 걸어둔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이하 가등기)'가 문제였다.
가등기는 잔금을 치르기 전 집주인의 이중 매매를 막기 위해 미래에 이 집을 소유할 예정이라며 일종의 매매 예약을 걸어두는 등기다. 이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순위 보전' 효력이다. 가등기 상태에선 소유권이 넘어온 게 아니어서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다. 하지만 가등기를 신청한 이가 본등기를 하는 순간 소유권 시점이 본등기 날짜가 아니라 가등기 신청날로 소급된다. 이 때문에 가등기가 걸린 주택은 경매시장에서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김씨가 집을 낙찰받으려면 C씨가 직접 가등기를 말소하게 하거나, 아니면 사해행위 소송으로 가등기를 말소해야 하지만 이 역시 C씨가 사기 목적으로 가등기를 했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C씨와 연락이 닿을 길이 없어 반년 넘게 발만 굴러야 했다.
그러다 최근 가까스로 C씨와 연락이 닿았다. 가등기란 지독한 덫 때문에 셀프 낙찰도 받을 수 없다며 이런 덫을 친 B씨를 엄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는데, C씨의 국선변호사가 이를 확인하고 C씨와 김씨를 연결시켜 준 것이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C씨 역시 전세사기 조직 일원 중 1명이었다. C씨는 B씨 아들 D씨의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바지 집주인 A씨는 해당 빌라 청소부였다. 부자지간인 B씨와 D씨가 닥치는 대로 다른 사람 명의를 모아 벌인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C씨는 명의를 빌려 달라는 D씨 요청을 들어줬다가 본인도 현재 80여억 원의 빚더미에 올라섰고 이를 비관해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할 만큼 정신이 피폐해졌다고 김씨에게 토로했다. 김씨는 C씨를 찾은 만큼 가등기를 말소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C씨는 김씨 요구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C씨가 실제 등기소까지 갔지만, 방식을 몰라 직원에게 핀잔을 들었다며 그 뒤로 아예 꿈적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김씨는 C씨와의 녹취록을 들고 변호사를 찾았다. 변호사는 승소 가능성이 높다며 대가로 성공 보수를 요구했다. 비용에 부담을 느낀 김씨는 정부가 운영하는 전세사기지원센터를 찾았지만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다. 김씨는 "정부가 가등기 악용 사례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최근 전세사기 대책에도 관련 내용이 빠져 상심이 크다"고 했다.
HUG 셀프 낙찰, 가등기 주택은 걸러
최근 HUG는 전세금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대신 물어주고 해당 주택을 직접 낙찰받아 임대주택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HUG 역시 가등기가 걸린 주택은 쳐다보지 않는다. 결국 가등기 덫에 걸린 피해자는 어디서도 구제받기 어려운 구조인 셈이다.
이주현 지지옥션 연구위원은 "HUG가 임차인 지위를 승계한 주택 중엔 가등기가 걸려 있는 빌라도 꽤 있는데 이런 빌라는 HUG도 셀프 낙찰을 받지 않는다"며 "결국 정부 차원에서 가등기 악용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경매시장에 쌓인 이런 악성 빌라 매물을 처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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