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구덕운동장과 몽플뢰르
숙론 생략되면 갈등 필연…공감대 형성까지 인내를
2014년 당선된 서병수 부산시장은 구덕운동장 재개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1971년 준공했으니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프로축구 부산 아이파크 홈인 종합경기장과 야구장·체육관이 워낙 낡아 유지보수비가 만만치 않았던 현실적 요인도 작용했다. 걸림돌은 막대한 재원. 부산시는 민간자본 유치에 매달렸다. 이번엔 수익성이 발목을 잡았다. 부산 아이파크를 운영하는 현대산업개발마저 손사래 쳤다. 몇몇 건설사는 체육관을 대형마트·극장·아이스링크로 구성된 복합건물로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상업시설에 체육시설을 끼워넣는 구색 맞추기였다. 고층 아파트와 호텔을 제안한 곳도 있었다.
고심하던 공무원들은 종합운동장은 놔두고 야구장·체육관만 허물자고 건의했다. 구덕운동장을 원도심 랜드마크로 개발하려던 서 시장도 “OK”. 언론은 “미래세대에 양보했다”고 평가했다. 부산시는 철거가 끝난 공터를 테니스장 풋살장을 갖춘 생활체육공원으로 가꿨다. 약 110억 원이 들었다.
최근 구덕운동장 개발이 재추진되면서 찬반이 팽팽하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15분 도시 비전투어’를 통해 종합경기장을 허물고 축구전용구장 건립을 선언하면서다. 부산시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주택도시기금 저리 융자(리츠)와 민간기업 출자를 통해 사업비를 조달한다는 구상이다. 구덕운동장이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혁신지구로 선정되면 국비 250억 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렸다.
관건은 민간투자를 유인하는 방법이다. 부산시는 생활체육공원 터에 아파트와 업무·상업시설을 지어 수익을 내도록 재무 구조를 설계했다. 동네 앞마당처럼 이용하던 생활체육공원을 뭉갠다고 하니 민원이 급증했다. 민심을 더 폭발하게 만든 원인은 고무줄처럼 늘어난 공동주택이다. 지난해 12월 부산시 보도자료에는 아파트 규모가 38층짜리 3개 동(530세대)으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지난 5월 공청회에선 49층 높이 4개 동(850세대)으로 바뀌었다. 불과 6개 월 새 세대수가 60% 늘어난 것이다. 부산시는 원자잿값과 공사비 상승으로 총사업비가 8000억 원대로 올라 불가피하다고 해명한다.
아무리 그래도 반 년만에 아파트 320세대를 더 지어야 할만큼 뛰었단 말인가. 납득이 쉽지 않다. 지역사회가 발끈하는 이유다. “사업 예정지(7만1577㎡)의 3분의 1에 아파트 짓는데 누가 찬성하나” “원자재가 더 오르면 체육시설이 아파트에 더부살이 할 판”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더 이해 안 되는 대목은 행정의 태도다. 공청회에서 반대가 많았는데 부산시는 도시재생혁신지구 신청을 강행했다. 10일 부산시의회에선 “거버넌스 구축과 의견 수렴이 부족하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행정절차를 위반했다” “특혜 논란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보존만이 능사라는 얘기가 아니다. 2015년과 현재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축구전용구장 찬성 여론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숙론(熟論)이다. ①축구전용구장이 필요한가 ②축구전용구장이 15분 도시와 무슨 상관인가 ③공공시설에 민간주택을 허가할 때 부작용은 무엇인가 ④축구전용구장이 그 부작용을 상쇄하고 원도심 발전의 기폭제가 될 수 있느냐 정도는 토론하고 동의를 구하지는 것이다. “HUG가 동참한 지금이 적기”라는 말만 되풀이해선 감정만 상하게 할 뿐이다.
동물 생태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신간 ‘숙론’(김영사)에서 몇 가지 숙론의 예시를 든다. 그 중 하나가 몽플뢰르 컨퍼런스다. 1990년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27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일촉즉발의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 몽플뢰르라는 도시에 차세대 지도자 22명이 모여 나라의 미래를 논의했다. 흑인 백인뿐만 아니라 좌파 우파 분리주의자도 참석했다. 1년 만에 4가지 시나리오가 도출됐다. 1994년 대통령에 오른 만델라는 모두가 함께 날아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비행하는 ‘플라밍고 시나리오’를 채택해 흑백 갈등을 최소화했다.
최 교수는 숙론을 제일 먼저 배워야 할 사람으로 국회의원을 꼽는다.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무원도 예외일 수 없다. 구덕운동장 재개발 목적이 ‘축구’가 아니라 ‘행복도시’라면 공감대 형성은 너무 당연하다. 수영만 요트경기장 재개발이 장기 표류하는 것도 결국 숙론 부족 탓이다. 사회학자 출신 박 시장이 숙론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다.
구덕운동장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9월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시작됐다. 1940년 11월 민족의거 노다이 사건 진앙지가 이곳이다. 부산시는 “역사성과 상징성을 고려해” 재생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싸그리 철거하면서 무슨 역사성이고 상징성인가. 과문한 탓인지 모를 일이다. 숙론의 장에서 설명해주길 바란다.
이노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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