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제도경쟁력이 국가경쟁력 좌우한다
산업·통상정책 재검토할 시점
대규모 보조금 지급 美·中·日과
'맞불'보단 실효성 높은 대책 필요
합리적 결정, 적시에 내리고
지속적 수행하는 제도 갖춰야
김동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
빠르게 산업화를 이뤄내고 글로벌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제조업을 육성한 한국에 지금 필요한 것은 산업·통상정책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우리는 산업화 시기에 국가의 자원을 특정 분야에 집중하면서 투자를 늘리고 연구개발을 지원하면서 세제 감면과 금융 지원 등을 적극적인 정책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 덕에 석유화학과 철강,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자동차와 조선 등 소재부터 중간재 그리고 최종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급성장, 미·중 전략 경쟁으로 인한 공급망 재편,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의 글로벌 추세 등으로 산업정책 환경은 크게 변하고 있다. 가장 좋은 산업정책은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intervention)하지 않고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라던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도 보조금과 수출 통제 및 지역 내 공급망 구축 등으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참여(engagement)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은 반도체 과학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제정하면서 보조금 경쟁을 촉발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과 대만이 서로 앞다퉈 보조금 지원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중국은 제3차 반도체기금 조성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2014년 1차 기금은 1387억위안, 2019년 2차 기금은 2040억위안, 그리고 이번 3차 기금은 3440억위안(약 475억달러, 약 65조원) 규모일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일본은 구마모토현에 TSMC 공장 유치를 위해 1차와 2차에 걸쳐 약 1조2000억엔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과연 한국은 이런 보조금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보조금 규모 경쟁에서는 밀릴 수 있겠지만, 정책효과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실효성을 높여 단순한 생존이 아닌 경쟁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대런 애스모글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오래전부터 ‘제도(institution)’의 중요성을 연구해 왔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기에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같은 규모의 정부 보조금이 있더라도 어느 시점에, 어떤 기업에, 무슨 명목으로 지원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보조금 지원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정부의 시스템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지금은 각국이 얼마나 합리적인 제도를 운용하느냐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정치와 사회 측면보다는 경제와 산업 측면에 집중해 보면 산업·통상정책의 실효성은 곧 정책·제도의 효율성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이다. 정책 수립에 있어 충분히 숙의해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정책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 많은 경우 지역 간 이해관계나 이해 당사자의 이익 등 주관적인 요소가 정책 결정을 좌우한다. 둘째, 정책 제도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서는 정책의 적시성이 중요하다. 보조금 지원과 산업클러스터 조성 그리고 특정 분야의 창업기업 지원 등은 언제 그 정책이 추진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정책 지원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추진될 수 있도록 미리 분석하고 준비해야 가능한 일이다. 셋째, 단기·중기·장기 정책 간 연계성 및 지속성이 중요하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의 단기 정책이 중장기적으로 추진된다면 정책에 대한 신뢰 손상은 물론 정책효과도 반감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정책이 연계성과 지속 가능성을 갖기 위해서는 정부의 중장기 정책 기조 수립 및 그에 대한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이런 합리성, 적시성, 연계성은 비단 정부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내 의사 결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결국 정부와 기업이 이인삼각 경기하듯 서로가 같은 목표를 향해 우수한 제도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로벌 사회는 서로 비슷한 정책 수단으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정책을 벤치마킹하기는 쉽지만,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는 제도를 따라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제도를 합리화하고, 적시에 정책을 추진하며, 정책 간 연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여전히 기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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