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세월 따라 옅어져 가는 꿈, 사랑의 합창으로 채색하다
인제 출신 박인환 시인 삶 소재
‘목마와 숙녀’ 등 대표 시 극화
김수영 등 문인 묘사 완급 조절
프로젝터 활용 드라마틱 연출
혼돈의 시대 예술인 고뇌 담아
이동식 객석 활용 참여형 호응
“그대 오늘의 주인이여, 자유의 도시를 위해 사랑의 씨를 뿌리라 / 두려움 없이 일어서라, 내 삶의 주인이여”
100분간 박인환의 삶이 몰아쳤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등 처절한 현실에서도 ‘삶의 끈’과 ‘시의 꿈’을 모두 놓지 않았던 31년의 생애가 공연 ‘가객 박인환’을 통해 펼쳐졌다. 근대와 현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친일과 저항 사이에서 자칫 의도치 않은 프레임에 갇히기 쉽던 모순의 시대.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이 틀에서 자유로울까.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인제 출신 시인 박인환의 삶을 그린 강원도립극단의 정기공연 음악극 ‘가객 박인환’의 춘천 공연이 지난 8일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시작은 낭만과 모던. 박인환이 서울 명동에 개업한 ‘마리서사’에 김수영·이봉구·전혜린 등 당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여 시대의 희망을 논하는 왁자지껄한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졌다. 혼돈의 시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지식인들의 고민이 1장부터 펼쳐져 극의 주제를 암시했다. “입으론 한 잔 술을 마시고 두 눈은 뱀처럼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는 박인환의 극 초반 대사가 이를 명확히 한다.
사랑의 순간으로도 이어졌다. 박인환과 아내 이정숙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대사 대신 아름다운 음율과 고난도 리프트 기술이 섞인 안무로 시각화하는 쪽을 택했다.
‘목마와 숙녀’ 등 대표작은 물론 덜 알려진 시들도 적극 인용,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노래하는 ‘검은 신이여’가 대표적이다. 전쟁의 비참함을 묘사한 듯한 이 시와 함께 실사급 애니메이션으로 마치 눈앞에 전쟁이 닥친 것 같은 공포감을 선사했다. 허공에 매달리거나 무대 위 내팽개쳐진 크고 작은 인형들은 죽음이 난무한 시대를 직유했다.
이어지는 고통의 시기에서도 드라마적 연출이 집중도를 높였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문 당하는 모습을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에서 밀착 카메라로 촬영해 흑백 프로젝터로 상영함으로써 현장감과 극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벗이자 라이벌 김수영(박두희 분), 스승 오장환(류창우 분), ‘정신적 황제’ 이상(신정웅 분) 등 박인환에게 영향을 미친 시인들과의 관계도 치밀한 연출 속에 다뤄졌다. 모더니즘과 저항, 서정 등 다양한 시들이 공존하며 현대 시가 태동하던 시기를 고려, 완급조절을 고민하며 이들의 관계도를 무대에 그린 결과다. 코믹과 진지를 넘나들며 시를 논하는 박인환과 김수영의 묘사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이상은 여러 방향의 가면 오브제와 등장해 관객이 자체 해석할 여지를 넓혔다. 피사체를 무한 복제한 듯한 영상 효과도 그의 시와 어우러졌다.
배우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서울 명동에서 운영하던 주점 ‘은성’도 고증해 친근감을 줬다. 예술인의 사랑방이었던 이곳에서 박인환이 시를 쓰자, 이진섭 작곡가가 곡을 붙이고, 배우 나애심이 노래를 하는 장면. 그렇게 만들어진 ‘세월이 가면’을 즉석 통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한 부분에서는 관객들도 음을 보탰다. ‘명동백작’의 시대였다.
배우들도 빛났다. 원톱으로 극을 이끈 박철웅 배우가 가창과 안무, 절규 섞인 대사에 하모니카도 연주하며 다채로움을 더했다. 다른 배우들도 피아노와 드럼 등 연주를 병행했고, 오장환은 58세 최고령 배우단원 류창우 배우의 열연 속에 강렬하게 그려졌다.
극단이 처음 시도한 관객참여 방식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관객을 실은 이동객석(박인환존), 김수영이 운영한 양계장에서 모티브를 얻은 ‘양계장존’, 공연 말미 합창을 함께 하는 ‘가객존’ 모두 호응을 얻었다. 특히 춘천 공연에서는 춘천시립청소년합창단 단원들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함께 불러 관객을 공연의 진정한 주체로 만들었다.
도립극단은 15일 오후 3시 이 작품이 처음 태동한 박인환의 고향, 인제 하늘내린센터에서 도내 순회를 마친다.
하루하루의 수고에 지친 관객을 위해 희망의 별빛을 극장에 띄우고 싶다는 김경익 예술감독의 말처럼 짧은 삶에서도 사랑을 노래한 박인환의 시를 통해 서로 위로하고, 내일을 살게 하는 원동력을 얻은 100분이었다.
잡히지 않는 꿈과 밀고나가야 할 현실 사이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승자는 없겠으나, 그래도 묻는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기꺼이 손잡고 합창할 준비가 되었느냐고. 김여진·최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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