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중국의 풍향계, 천안문 광장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나뉘어진 베이징에서 천안문은 내성의 중심인 황성(皇城)의 정문이었다. 중국의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를 구분 짓는 문이었다. 문 앞 광장은 황족과 귀족들의 것이었고, 외성의 백성들은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다.
1911년 청 왕조가 무너지며 천안문 광장에 민중이 드나들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이 광장은 중국이 무엇을 포용하는지 알려주는 ‘풍향계’가 됐다. 중국 최초의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인 ‘5·4운동’이 천안문 광장에서 시작됐다. 베이징 내 대학교 13곳의 학생 3000명이 모였다. 1949년 10월 1일에는 마오쩌둥이 이곳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19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홍위병 수십 만이 광장에 모였고, 1976년에는 문혁을 비판하는 4·5운동이 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1989년 4월엔 후야오방 총서기가 사망하자 전국에서 추모 분위기가 일어 그해 6월 천안문 사태를 불렀다.
굴곡의 시대를 거쳐 2000년대부터 천안문 광장은 모두에게 개방된 듯했다. 개혁·개방 정책이 궤도에 오르며 정치보다 경제가 강조된 대국에 세계 각지에서 외국인들이 몰려들었고, 천안문 광장은 과거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인증샷’ 명소로 자리 잡았다. 명실공히 ‘새로운 중국’을 상징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은 오늘날 다시 금역(禁域)으로 회귀하고 있다. 천안문 사태 35주기인 지난 4일 천안문 성루는 ‘전일(全日) 입장 불가’ 안내문을 걸었고, 시민들의 광장 입장도 제한했다.
지난달 천안문 광장 단체 투어에 참여했을 때는 외신 기자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쫓겨나는 경험도 했다. 까다로운 예약 절차를 거쳐 여행사 가이드와 함께했는데도 입장이 거부됐고, 과거에는 가능했던 ‘경찰 동행 감시’ 요구도 거절됐다. 가방 검사만 두 번 받았고, 여권은 귀가를 약속한 뒤에 돌려받았다. 상명하복에 익숙한 경찰들은 “상부 지침”이란 말만 반복했다. 답답한 마음에 친분이 있는 중국 기자에게 위챗(중국판 카카오톡)으로 하소연했더니 “우리 그만 대화하자”는 반응이 돌아왔다.
거대 경제를 구축하고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국제 영향력을 확보한 중국이 ‘광장 폐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중국 정치 체제, ‘전랑 외교’ ‘중국 경제 모델’ 등을 노골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이들만 광장 안에 들여보내는 ‘선별 작업’이 한창이다.
천안문 광장 투어에 함께했던 한국인 관광객들의 뒷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들 중 일부는 “기자 한 명 때문에 투어 시간이 지체됐다. 알 만한 사람이 중국 분위기도 모른다”면서 대놓고 조롱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자금성에 입장하려고 하자 1m가 넘는 셀카봉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관람을 제한받았다고 한다. 중국 내부에 진입한 이들도 언제든 외부로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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