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35]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의 미술가
미술가 박모(朴某·1957~2004)는 1981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다음 이듬해에 뉴욕의 미술학교에 진학했다. 1985년에 석사 과정을 마치고 브루클린에서 전시 공간을 운영하다 1995년 귀국했다. ‘박모’는 미국에서 본명 대신 사용하던 예명인데, 귀국 후 ‘박이소’라고 다시 개명하고 작가이자 교육자, 평론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47세에 요절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작품은 많지 않으나, 대신 유학 시절인 1984년부터 세상을 떠나던 2004년까지 작품을 위한 사유의 과정을 낱낱이 담은 스물한 권의 작가 노트가 있다. 그 덕분에 뒤에 남은 이들은 작가가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고민을 하고, 얼마나 많은 습작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태극기 위에 쌀과 석유용 드럼통을 얹은 이 그림은 1984~85년에 작성한 첫 번째 노트에 수록된 스케치다. 이즈음 박모는 쌀, 쌀가마니, 드럼통과 태극기, 한반도 지도를 소재로 수많은 드로잉을 반복했다. 왜 쌀과 드럼통인지는 물자 절약을 지상명령으로 삼고 성장했던 대한민국 40대 이상의 독자라면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었던 박모는 부유한 나라에서 미술가로 살아가면서 과연 어떻게 하면 ‘밥값을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했던 것. 그는 노트 한 귀퉁이에 ‘쌀과 기름이 그림보다 중요하다’고 적으면서도, 척박하기만 한 한국의 현실에서 미술을 업으로 삼은 이상, 단순한 생존 이상의 정신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예술의 힘을 믿었다.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열광하는 걸 박모가 본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이게 된다니’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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