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할 땐 비교해서 넌지시…” 체스터필드의 매너교육, 英 강타[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2024. 6. 10. 22: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생아 아들 너무 사랑한 백작
20년 동안 편지로 인생 조언
“첫눈에 상대 사로잡는 품위 중요”
기분좋게 하는 아부 기술도 포함… 오늘날까지 부모들에게 큰 인기
영국 왕가의 아들들과 교사를 그린 18세기 그림. 조지 1, 2세 때 외교관, 아일랜드 총독 등으로 활약한 체스터필드 백작은 저서 ‘아들에게 주는 편지’를 통해 엘리트 자제들이 갖춰야 할 매너를 소개했다. 그는 아무리 천박한 사람이라도 성의 있게 대해야 하고 때로는 적절한 아부로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사진 출처 ArtUK 홈페이지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英귀족이 쓴 ‘아들에게 주는 편지’




‘지식은 사람을 소개하게 하고, 좋은 매너는 최고의 사람들에게 귀염받도록 만들어준다.’ 체스터필드 백작이 쓴 ‘아들에게 주는 편지’의 한 대목이다. 체스터필드 백작(1694∼1773)은 영국 최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8세기 유럽의 외교무대에서 크게 활약한 외교관이자 아일랜드 총독을 지내기도 한 뛰어난 정치가다. 우아한 매너와 사람을 꿰뚫어 보는 안목, 좌중을 압도하는 웅변가로 유명했던 그가 오늘날까지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뜻밖에도 ‘아들에게 주는 편지’ 때문이다.》

‘아들에게 주는 편지’는 체스터필드가 남긴 수백 통의 편지를 모은 책이다. 그가 편지를 쓴 대상은 헤이그에서 대사로 근무할 당시 프랑스 출신 가정교사와의 외도에서 낳은 외아들 필립이다. 아들의 자리를 부탁했을 때 국왕 조지 2세가 ‘쓸모없는 서출’이라고 응답했듯이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하지만 합법적인 자식이 없었던 체스터필드는 이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무려 20년 동안이나 인생에 대한 조언을 써 보냈다.

체스터필드 백작(1694∼1773)의 초상화. 그는 우아함의 총화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귀족이자 정치가였다고 전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체스터필드는 아들을 직접 교육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길고 세심한 편지로 만회하고자 했다. 이때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아들의 매너 교육이었다. 좋은 매너의 결과물은 바로 품위였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품위(Decency)다”라고 말했다. 품위는 첫눈에 사람을 사로잡는 힘을 가진 것으로, 재능처럼 발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보자마자 곧바로 위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 품위를 갖추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에 필요한 기초적인 매너를 차근차근 갖춰 나가야 했다. 이와 관련해 체스터필드는 어텐션(attention)을 강조한다. 어텐션은 주의력, 집중력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더 정확하게는 누군가와 만날 때 혹은 어떤 일을 할 때 관심을 가지고 성의껏 임하라는 뜻이다. 체스터필드는 단호한 어조로 “그런 성의 있는 태도가 없으면 어떤 일도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흔히,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즉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약하거나 아픈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로 결국 관직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어제까지 친하게 지냈던 사람도 오늘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끼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가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대화에 끼어들어 제 이야기만 늘어놓기도 한다. 아무리 모인 사람들이 천박하다 할지라도,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무심한 듯 보여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겉도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충고다. 그런데 성의 없는 행동이 초래할 더욱 위험한 결과는 남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체스터필드는 “경멸만큼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건 없다. 모욕은 육체의 상처보다 아물기 힘들다”라고 강조했다.

경멸과 무시의 정반대 개념으로 상대방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는 행동, 즉 호감을 사는 행동이 있었다. 당시 ‘남을 기분 좋게 하는 기술(art of pleasing)’이라고 불린 이 기술에 관한 한 체스터필드는 그야말로 최고의 전문가였다. 그는 “이 기술을 고도로 숙련한 사람은 누구에게서라도 애정을 끌어내어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 줄 수 없는 힘을 갖게 하고 출세하도록 만든다”라고 단언했다.

남을 기분 좋게 하는 기술의 정점에 놓인 것은 성공적인 아부였다. 체스터필드는 아들에게 아부의 철칙도 가르쳤다. 첫째는 악행이나 범죄를 칭찬하는 아부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거부하고 상대방이 단념하도록 설득해야 할 일이었다. 둘째,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다 칭찬을 원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셋째, 아부가 설득력을 발휘하려면 일정한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칭찬하려면 “응용, 추론, 비교, 암시, 그리고 직접적이지 않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아버지가 그 오랜 세월 절절한 편지를 써 보냈던 체스터필드의 아들은 과연 얼마나 훌륭하게 자랐을까? 아들 필립은 우아함의 총화였던 아버지와는 완전히 딴판인 인물로 성장했다. 어색하고 산만한 몸가짐에다 눌변인,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겨우 의회에 입문한 첫날 소개하러 일어선 자리에서 입이 얼어붙어 다시 일어서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아들에게 주는 편지’는 체스터필드 사후 출간된 바로 그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자식에게 최상급의 엘리트 매너를 가르치고 싶은 부모의 열망을 투영하는 셈이다. 그것은 18세기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체스터필드의 편지가 처음 출판됐을 무렵 영국 독자들은 백작의 눈물겨운 아들 교육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식에 대해 부푼 기대감을 한 수 접고 그 내용을 접했으리라. 심지어 어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묘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