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들의 전쟁 몽유병을 자극하는 남북한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미-중과 미-러의 협력 해체는 1차 대전 원인인 유럽 열강들의 견제와 협력 체제 붕괴에 해당하고, 미국이 중·러의 세력권을 한치도 인정 못 하는 것은 2차 대전 때 독일 세력 불용과 겹쳐진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요즘 국제 정세를 보면 3차 대전이 내일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1·2차 대전을 일으킨 원인들이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1차 대전이 발발한 배경은 유럽 강대국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맹과 연대의 해체다. 즉, 세력 균형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거치며 통일된 독일은 유럽 최강국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영국 야당인 보수당 대표였던 전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는 “프랑스 혁명보다도 더 큰 정치적 사건은 독일 혁명”이라며 “새로운 세계에 들어갔다. 세력 균형은 완전히 파괴됐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럼에도 이후 50여년간 유럽에서 평화가 유지됐던 것은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가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능숙한 외교를 펼쳤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통일에 만족하고, 식민지나 유럽에서 더 이상의 영토 야욕이 없음을 누차 공표해, 다른 열강들을 안심시켰다. 그는 “발칸은 포메라니아 척탄병 한명의 뼛조각만치도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충돌하는 발칸에 야욕이 없음을 러시아에 확인시켜줬다. 그러면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세력 균형을 조성했다. 패권국인 영국은 독일이 국외에서 자신들의 식민지 패권을 위협하지 않고, 유럽에서는 그런 동맹으로 경쟁국인 프랑스를 견제해주는 데 만족했다.
5대 열강인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라는 다섯개 공을 돌리면서 항상 독일 쪽에 유리하게 세개 공을 쥐는 비스마르크의 저글링 외교는 새로 등극한 빌헬름 2세(1859~1941)가 그를 퇴장시키면서 끝이 났다. 비스마르크가 사임한 1891년 독일은 러시아와 동맹인 재보장조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독일의 고립을 막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이루던 고리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1년 만에 프랑스와 러시아가 2국 협상을 체결했고, 3년 뒤 영국도 이에 가세해 3국 협상이 성립됐고, 독일은 3국 협상과 대결하기 시작했다. 결국 1918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로 1차 대전이 시작됐다.
2차 대전은 1차 대전의 연장이었다. 승전국들은 패전국 독일에 가혹한 족쇄를 채우며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세력에 상응하는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다른 세력 불균형을 낳았다. 1차 대전 뒤 패권국 영국은 쇠락했고, 새로운 패권 세력이 될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퇴각했고,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국제사회에서 퇴출됐다. 유럽에서는 허약한 프랑스만이 불만에 찬 독일을 상대해야 했다. 히틀러의 등장은 독일의 세력을 회복하려는 전쟁으로 치닫게 했다.
냉전 종식 이후 국제사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규율됐다. 그 조건은 중국을 국제교역 체제에 편입하는 미-중 협력과 냉전의 패전국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의 순치에다가, 세계무역기구 등 다자 체제의 규칙에 입각한 질서였다. 하지만 이 질서 내에서 중국이 부상하자 미-중 협력이 깨지며 대결이 시작됐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확장을 가속화하면서 러시아와 대립하다가 급기야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이후 세계무역기구 등 다자 체제의 규율은 형해화됐고, 대신에 미국의 일방적 규칙 기반 질서가 제창됐다. 중·러는 이에 저항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중, 미-러 사이에서 각자의 세력권을 다툼하는 대결로 치닫고 있다.
미-중과 미-러의 협력 해체는 1차 대전의 원인인 유럽 열강들의 견제와 협력 체제 붕괴에 해당한다. 미국이 중·러의 세력권을 한치도 인정 못 하는 것은 2차 대전 때 독일 세력 불용과 겹쳐진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대만해협 긴장은 그 결과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핵 조기경보 시스템을 공격하고, 러시아가 핵 보복 위협을 하고 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1일 샹그릴라 대화에서, 유럽과 중동에서 역사적인 분쟁 발생에도 불구하고 아시아·태평양은 “우리 최우선 작전 전역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가자 전쟁과 상관없이 중국과 일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한반도에서는 남쪽의 대북전단 살포에 북쪽은 오물 투척으로 응수하고, 남은 다시 대북방송으로 더 나아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문제의 시작인 대북전단은 표현의 자유이고, 북한의 오물 투척은 도발이라고 강변한다. 한반도는 미국이 최우선 작전 전역으로 상정하는 아태 지역에서 방아쇠의 하나이다. 열강들은 지금 전쟁으로 걸어가는 몽유병자들이다. 남북한 당국은 이 몽유병자들의 충돌을 재촉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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