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꺾인 투쟁 의지…오만함 깨닫게 한 장기수들
1987년 4월13일을 잊지 못한다. 항소심에서 징역 2년형을 확정받고 대전교도소로 이감간 날이다. 교도관들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싱글벙글했다. 검은 지프에 실려서 대전으로 향할 때 라디오에서 전두환이 긴급 발표를 했다. ‘4·13 호헌 조처’였다.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발표였다. 그 발표를 들으면서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시국의 변화에 민감한 곳이 감옥이었다.
대전교도소는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최신식 시설이라고 했다. 일본강점기부터 정치범들을 수용해왔고 1970년대에는 비전향장기수들을 악랄하게 다루었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처음에는 미지정 사동의 혼거방에 들어갔다. 미지정 사동은 출역(공장 등에 작업을 나가는 것, 형이 확정된 기결수들은 의무적으로 출역을 해야 한다) 나가서 말썽을 일으켜 징계를 받은 기결수들을 모아놓는 곳이었다. 대전교도소의 한다하는 꼴통들이 다 모인 곳이다.
그 사동에 배정받은 며칠 뒤에 노항래가 내가 있는 사동으로 들어왔다. 그는 영등포구치소, 영등포교도소를 거쳐서 대전교도소까지 내 뒤를 따라온 것이다. 노항래는 그런 친구다. 시설은 최신식 시설이어서 수세식 변기를 쓰고, 방 안에서 수돗물을 쓸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항복
내 인생은 언제나 순탄한 법이 없었다. 5월15일, 나와 항래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리기 위해서 사흘간 단식을 하기로 했다. 5월18일까지 무사히 단식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이었다. 사동이 술렁거리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날 교도소에서 체육대회를 하기로 했는데, 미지정 사동인 우리 사동만 제외한다는 방침이 일방적으로 통보됐다. 방 안에만 갇혀 지내던 재소자들은 여기저기서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영등포교도소에서 했던 것처럼 “운동회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문짝을 걷어찼다. 몇 번 걷어차지도 않았는데, 교도관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우리를 끌어냈다.
돼지묶음을 당한 채 징벌 사동 독방에 던져졌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사흘간의 단식 끝이어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고, 팔과 다리를 묶은 포승줄이 엄청난 강도로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혀를 깨물자, 그러면 포승줄을 풀어줄 것 아닌가? 마룻바닥에 엎어진 채 혀를 빼물고 꽉 깨물었다. 안 깨물어졌다. 두 번, 세 번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혀를 빼물고 마룻바닥에 턱을 내리찍었다. 그제야 혀끝이 잘리고, 입안 가득 피가 고였다. 나는 울부짖으면서 벽과 바닥에 피를 뱉어냈다. 그러기를 몇 번 더 반복하자 벽면과 바닥이 붉은 피로 뒤덮였다.
옆방에 있던 항래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큰 소리로 교도관을 불렀다. 문이 열리더니 교도관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포승줄을 푸는 게 아니라 허리를 밟고는 더욱 팽팽하게 조였다. 거기에 방성구(防聲具,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머리에 씌우는 도구)까지 뒤집어 씌었다. 그러잖아도 고통스러워 더는 못 버틸 지경이었는데, 이건 완전히 사람을 잡겠다는 짓이었다. 팔과 다리를 묶은 포승줄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왔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다시는 교도소 안에서 소란을 떨지 않고, 규율을 잘 지키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포승줄로 묶였던 팔과 다리에는 물집이 터져서 쓰라렸고, 잘린 혀는 통증이 심해졌다. 퉁퉁 부어오른 상처보다 더 끔찍한 건 내 마음이었다. 폭력에 굴복했다는 무력감,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는 전사가 이깟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자괴감에 너무 괴로웠다.
장기수들
교도소는 나를 ‘6사하’(6동 하층)로 보냈다. 이 사동은 모두 독방이었는데, 약 스무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었다. 무기징역부터 20년~7년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난 것이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관련자도 있었고,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의 강용주도 거기서 만났다. 강용주는 최연소 무기수였고 나중에 가장 마지막에 풀려났다.
그들은 10~20년의 감옥살이에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정좌한 자세로 명상을 했고, 방 안을 깨끗이 쓸고 닦은 다음 책을 읽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깍듯했다. 내게도 “박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들의 생활 태도를 보면서 나는 반성에 반성을 거듭했다. “내가 오만했구나.” 장기간 구금생활을 해온 그들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비추어보는 거울이었다. 운동은, 혁명은 입으로만 떠들어서 되는 게 아니잖은가.
하루는 매케한 바람이 불더니 재채기가 나왔다. 최루탄 냄새였다, 대전 시내에서 10㎞도 더 떨어진 이곳에 최루탄 냄새라니, 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면회를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밖에서 4·19 때보다 더 큰 데모가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도관들이 군복을 입고, 소총을 메고 근무를 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았다. 6월9일 최루탄에 피격당한 이한열이 투병 중이던 7월5일 운명했고, 7월9일 장례식이 예정돼 있었다. 이한열 장례식 전날 전국의 구치소, 교도소에서 양심수들이 일제히 풀려났다.
약 13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다음날 아침, 마을 어른들이 모두 인사를 왔다. 하나같이 내 손을 잡고는 “화성에서 애국자가 났다”고 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간 뒤에는 우리 집에 발길을 끊었던 이웃들이었다. 빨갱이 집과 왕래하면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른다며, 품앗이마저 거절해 부모님이 무척 힘들었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6월 항쟁에 이어 석달여 동안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졌다. 울산에서 시작된 불길은 곧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파업 등을 거치면서 1300개의 민주노조가 생겨났다. 개헌이 있었고, 대선이 이어졌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했는데 학살원흉이 대통령이 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간 나와 동생은 복학을 했다. 나는 여전히 감옥에 있는 양심수 석방 운동과 노동자 파업 지원 활동을 했다. 그렇지만 교도소에서 혹독하게 구타와 고문을 당한 탓이었을까?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점차 앉아 있기도 힘든 지경이 됐다. 결국 공장으로 돌아가 노동운동을 한다는 계획을 접어야 했다. “대학만 졸업하며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 않겠다”는 아버지의 다짐을 받고 나는 복학했다.
새벽 전화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다. 숭실대에 복학한 동생은 인문대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해 4월에 총선이 있었는데, 여당인 민정당보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의 의석수가 훨씬 더 많았다. 여소야대 국면이 열렸다. 그 시절 나는 세계출판사를 운영하던 윤후덕 선배(현재 4선 국회의원)의 제안으로 운동권 수기를 쓰기로 하고, 출판사에 나가 집필을 시작했다.
1988년 6월5일 새벽 5시께, 안양의 자취방 집주인이 전화가 왔다며 나를 깨웠다. 전화기 너머로 형이 말했다. “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여기로 빨리 와, 래전이가…” 형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옆에 있던 친척 형이 대신 전했다. 래전이가 분신했다고.
박래군|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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