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뉴스룸에서]
김진철 | 문화부장
유리벽 너머에 수북이 쌓인 신발들이 아직 잔상으로 남아 있다. 유리벽 안에 진열된 신발들 아래에서 무심히 진공청소기를 밀며 쓸고 닦는 일꾼들의 일상이 함께 스쳐 지난다. 오랜만에 센 영화를 만났다. 지난해 제76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올해 제96회 아카데미 장편국제영화상과 제77회 영국아카데미영화상 등을 받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영화관이 어두워지며 잇달아 엄습하는 각종 소리들은 영화가 끝나고 조명이 켜진 뒤로도 숱한 잔영 속에서 더욱 강렬히 폐부를 파고들었다.
초반부터 아우슈비츠임을 알 수는 없다. 그저 평범한 독일어 대화 속에 독일군 장교 가족의 평온한 일상이 흘러갈 뿐이다. 이들은 평화로운 들녘에서 소풍을 즐기고 아늑한 정원에서 파티를 열어 함께 웃고 즐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죽어가는 유대인들을 목격할 수는 없다. 다만 음산하게 이어지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들이 말 그대로 단말마였던 것이다. 파란 하늘에 때때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맑은 강으로 이따금 잿빛 물줄기가 닥칠 때 망각하거나 외면했던 진실을 직면하게 된다. 이 영화는, 찌르고 베고 쏘고 휘갈기는 유혈 낭자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그보다 더한 공포와 긴장에 시종일관 관객을 붙들어둔다.
오티티(OTT) 시대에 만나기 어려운 미감 또한 느꼈다. 영화관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이 강렬한 소리가 제구실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음악과 음향이 영상 못지않은 큰 역할을 할 때 영화관의 존재 이유는 더욱 도드라진다. 웹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상물이 홍수를 이루며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이라는 손쉬운 장치 없이는 한편의 서사도 완성하기 어려워 보이는 케이(K)컬처의 나라에서, 넷플릭스가 감당하기 어려운 영화의 등장이 무척 반갑다. 영화가 되살아날 지점을, 오티티나 시리즈물이 아닌 여기 어딘가에서도 찾아봤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런 영화가 등장한 토양이 부럽다. 나치는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만든 아우슈비츠 수용소 주변 지역을 ‘관심 지역’(das Interessengebiet, the zone of interest)이라고 했다. 유대인 포로들로부터 몰수한 금품과 그들의 노역으로 거둬들인 작물로 풍요를 누린 독일군은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유대인 대량 학살에 앞장서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머물기를 바란다. 유럽은 이토록 잔혹한 역사를 되짚으며 반성한다. 과거사를 거듭 까발리고 분해하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뒤집어 보고 바로 본다. 역사적 사실들을 깊이 새겨넣어 영원토록 기억되게 함으로써 다시는 뼈아픈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는 여느 홀로코스트 영화와 달리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아닌 수용소 담벼락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관객을 밀어붙인다.
이 영화를 만든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유대계 영국인이다. 글레이저 감독이 오스카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손을 미세하게 떠는 장면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메모지에 정리한 내용을 그렇게 읽었다. “우리는 지금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수많은 무고한 사람을 분쟁으로 이끈, (이스라엘의) 점령에 이용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영화는 ‘비인간화’(dehumanisation)가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마스의 공격으로 발생한 희생자이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발생한 희생자이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들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이 세운 나라가 또 다른 학살을 벌이듯, 누구라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때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 일상 바로 너머에서도 끔찍하고 잔혹한 일들은 연일 벌어진다. 우리는 성찰하지 않음으로써 망각하거나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뒤얽힌 채 전시된 유대인의 신발 11만켤레를 기억한다면, 가자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만행과 학살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일본제국주의가 벌인 온갖 잔혹한 참상을 21세기에 이르러,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됐다고 봉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으로 북으로 풍선을 띄우고 확성기를 틀어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통탄하지 않을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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