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주주에도 충실의무’ 상법 개정안···야당·정부 드라이브에 재계 반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 논란이 뜨겁다. 더불어민주당이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개정안을 제출했고, 현 정부도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차원에서 상법 개정을 적극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2일에는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증권학회가 주최하고, 금융감독원이 후원하는 상법 개정 관련 심포지엄이 열린다. 재계는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10일 상법 개정 시 소액주주들의 소송 남발이 우려된다는 보고서를 내는 등 강력 반발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 논의는 2021년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 이후 본격화됐다. 물적분할 이후 LG화학 주가가 떨어지자 소액주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됐다며 반발했다. 현행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은 회사로 한정돼 있다. 이 때문에 이사회가 경영상의 이유로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의사결정을 해도 소액주주들은 이사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에 21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이용우 의원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각각 2022년과 2023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정부·여당과 재계의 반대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야당을 중심으로 입법 추진 움직임이 재개됐다. 정준호 민주당 의원은 지난 5일 같은 취지의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정 의원은 법안 취지에 대해 “현행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가 회사의 이익에 한정돼 있다”며 “이 때문에 자본 거래에서 일반주주가 막대한 손실을 봐도 이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추가함으로써 회사에는 영향이 없더라도 일반주주의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 이사에게 주주에 대한 보호 의무를 부과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도 21대 국회에 이어 개정안을 다시 발의할 방침이다.
정부도 유사한 방향의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상법 개정에 소극적이었던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2일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서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하도록 상법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이후 기류가 달라졌다. 정부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상법 개정에 접근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9일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신속히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있다”며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법무부가 6~7월 공청회를 통해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기재부는 상법 개정 관련 공청회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도 적극적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달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인베스트 K-파이낸스’ 기업설명회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개인 의견으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무조건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증권학회가 12일 주최하는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 축사를 한다.
[현행 상법]
제382조의3(이사의 충실의무)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정준호 의원 개정안]
제382조의3(이사의 충실의무)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주주의 비례적 이익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야당과 정부의 합세로 상법 개정이 가시화되자 재계는 강력 반발하고 있다. 한경협은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 의뢰해 작성한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전제로 하는 이사의 충실의무 인정 여부 검토’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는 상법 개정에 따라 다양한 경영상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액주주는 배당 확대나 단기적 이익 분배를 요구하고, 지배주주는 이익을 회사에 장기간 유보할 것을 주장하는 등 주주 간 이해관계 상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사가 이러한 이해충돌을 합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상법 개정이 이뤄지면 이사는 다양한 주주들로부터 충실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권 교수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 보장은 현실화시킬 수 없는 이상적 관념에 불과하다”며 “이를 상법에서 강제할 경우 회사의 장기적 이익을 위한 경영 판단을 지연시켜 기업 경쟁력이 저하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병한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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