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영웅’에서 한·중·일 배우가 이룬 ‘동양평화론’
“5년 뒤면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입니다. 뮤지컬로 만들어주시면 안됩니까?”
2004년, 눈썹이 짙고 건장한 젊은 청년이 윤호진 연출을 찾아와 대뜸 말했다. 1995년부터 뮤지컬 ‘명성황후’를 이끌어 온 윤 연출은 “대형 역사물 프로젝트를 또 하기엔 지쳤다”며 거절했다. 청년은 1주일 뒤 다시 찾아왔다.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15가지 이유를 밝혔는데, 그 첫번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입니다. ‘명성황후’ 후속편으로 해야 합니다.” 윤 연출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얼마 뒤 윤 연출은 궁금한 마음에 자료를 찾아봤다. 청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안중근 의사에 빠져들었다. 5년간 작업한 끝에 의거 100주년 기념일인 2009년 10월26일 뮤지컬 ‘영웅’의 막을 올렸다. “나중에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 알아보니 그 청년이 나를 찾아오고 얼마 뒤 심장마비로 급사했다고 하더군요. 순간 안중근 의사의 혼이 나를 찾아왔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은 ‘영웅’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윤 감독이 당시를 떠올렸다.
‘영웅’은 초연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1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링컨센터 무대에 섰고, 2015년 의거 장소인 중국 하얼빈에서도 공연했다. 2022년 윤제균 감독의 동명 뮤지컬 영화로 제작돼 개봉했고, 2023년 ‘명성황후’에 이어 국내 대극장 창작 뮤지컬 사상 두번째로 누적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리고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15주년 기념 공연(8월11일까지) 막을 올렸다.
15주년에 이르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초연부터 모두 참여한 배우 정성화다. 외모까지 닮아 ‘안중근의 환생’이란 평을 듣는 그는 동명 영화 주연도 맡았다. 그는 지난 4일 프레스콜에서 15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첫 공연을 꼽았다. “개막 첫날 재판 장면에서 ‘누가 죄인인가’를 부르고 났더니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큰 함성이 터졌어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이번 공연의 안중근 역은 정성화와 함께 양준모·민우혁이 번갈아 연기한다.
‘영웅’에는 안중근, 이토 등 실존 인물뿐 아니라 가상의 인물도 등장한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궁녀 설희(유리아·정재은·솔지)가 대표적이다. 복수를 다짐한 설희는 이토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고 암살을 기도한다. 한아름 작가는 “뮤지컬이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해보고도 싶었다”고 설희라는 인물을 구상한 이유를 설명했다.
뮤지컬은 안중근을 단순히 위대한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인간적 고뇌, 두려움 등 약한 면모도 드러낸다. 그때마다 다잡아주는 이가 어머니 조마리아다. 원로배우 박정자가 조마리아 역에 처음 합류해 눈길을 끈다. 박정자는 2014년 연극 ‘나는 너다’에서 조마리아 역을 연기한 바 있다. 그는 “15년 동안 ‘영웅’을, 조마리아를 기다렸다. 과거 ‘나는 너다’를 준비하면서 중국 현장에 다녀왔다. 내 아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 재판정에서 당시 못 왔던 조마리아 여사 대신 내가 왔다는 생각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뮤지컬이 마지막에 강조하는 건 안중근 의사가 차가운 감방에서 죽기 전까지 집필했다는 ‘동양평화론’이다. 한·중·일 세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을 뮤지컬 넘버 ‘동양평화’로 풀어냈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와 교감을 나눈 실존 인물인 교도관 치바를 이번 공연에선 일본인 배우 노지마 나오토가 연기한다. 동명 영화에서 같은 배역을 맡았던 그는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고 실제 치바의 마음으로 연기했다”고 말했다.
안중근이 거사를 준비할 때 진심으로 돕는 중국인 친구 왕웨이는 가상의 인물이다. 한 작가는 “동양평화론을 작품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만든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에선 화교 배우 왕시명이 왕웨이를 연기한다. 왕시명은 “15주년을 맞아 실제 한·중·일 배우가 모여 작은 동양평화를 이뤘다는 점도 눈여겨봐 달라”고 당부했다. 윤홍선 프로듀서는 “지금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운 시기다 보니 제작자로서 평화의 메시지가 잘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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