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렬·박지일의 ‘냉정과 열정 사이’…“신들린듯 연기해야지 신들리면 안돼” [인터뷰]
1993년 첫 만남...희노애락 함께한 지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여물지도 않은 생각을 섣불리 행동에 옮기지 말고, 친절하되 절대 값싸게 굴지 마라. 싸움엔 끼지 말되 일단 끼게 되면 본때를 보여줘. 절약하되 옷차림에는 돈을 아끼지 마라. 사람들은 옷차림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거든.” (‘햄릿’ 중 폴로니우스의 대사)
아버지 폴로니우스가 먼 길을 떠나는 아들 레어티즈에게 하는 말. ‘충고’ 한 마디라며 꺼낸 이야기에 그의 인생 철학이 담겼다. 듣기에 따라 ‘꼰대력’ 최대치를 오르내리나, 낱낱이 따지고 들면 대단히 틀린 말도 없다. 배우 박지일은 폴로니우스를 이렇게 분석한다.
“스스로를 지적인 인물이라 과신하는 장황한 수다쟁이.”
‘햄릿’ 속 모든 비극의 도화선은 폴로니우스였다. ‘킹메이커’였던 폴로니우스의 죽음은 햄릿을 덴마크에서 추방시키고, 오필리어를 미쳐 죽게 만들었고, 레어티즈의 복수심을 유발해 검술 시합으로 인한 비극의 피날레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폴로니우스는 종종 ‘희극적 인물’로 여겨졌다. 심지어 셰익스피어 시절엔 광대 역할을 하던 배우들이 폴로니우스를 맡았다.
박지일은 “지적 우월감을 과하게 비춰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희극성이 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 남명렬은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의 70% 정도만 이야기하고 끝내는데, 폴로니우스는 100%를 말하니 듣는 사람은 괴로운데 보는 사람은 우스운 상황이 된다”고 봤다.
한국 연극계의 ‘가장 지적인 배우’로 꼽히는 남명렬(65) 박지일(64)이 폴로니우스의 옷을 입었다. 통념을 뒤엎은 캐스팅이다. 폴로니우스의 미처 몰랐던 면모를 꺼내기 위한 연출가 손진책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덕분에 두 배우에겐 숙제가 생겼다. 최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두 사람은 “희극배우가 할 것 같은 대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지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
박지일이 ‘정통’ 셰익스피어 ‘햄릿’을 하는 것은 데뷔 31년 만에 처음이다. 남명렬은 몇 해 전 국립극단 ‘햄릿’에서 클로디어스 왕을 연기했다. 두 배우 모두 “폴로니우스가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고 했다. 특히나 박지일은 “공연은 수도 없이 봤지만, 딱히 저 역할은 하고 싶진 않았다”며 웃었다.
캐스팅 이후 인물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기 경력 30년을 넘어서도 빼놓지 않는 과정이다. 남명렬은 “인물을 파보니 이 사람만의 삶의 여정과 정당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라스트 세션’의 프로이트, ‘두 교황’의 프란치스코 교황 등 30여년의 긴 시간 동안 보여준 그의 연기 행보와는 다른 인물이다. “이렇게 흥미로운 인물을 연기한다면 내 안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을 뽑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명렬)
그의 이야기를 듣던 박지일이 말을 보탠다. “아니야, 자기도 한 적 있어. 폴로니우스에 연극 ‘통속소설이 뭐 어때서’ 연기를 적극적으로 차용해야해.” 친구의 조언에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남자의 전형이었다”며 남명렬은 껄껄 웃는다.
이지적인 두 배우가 연기한다고 해서 수백년간 이어온 폴로니우스의 희극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남명렬은 “다른 사람보다 덜 웃기는 것은 원치 않는다”며 “다만 웃기는 질감이 다를 것”이라고 예고했다. ‘웃음 포인트’에 대한 욕심은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지일은 “어쨌든 재밌는 인물이어야 한다”며 “모두 심각한 사람 속에서 이 연극의 숨통을 틔어줄 수 있는 인물이 폴로니우스”라고 했다.
두 사람이 한 작품에 출연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서로 다른 역으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고, 같은 역에 캐스팅되기도 했다. 더블 캐스트로 이름을 올린 것은 ‘오펀스’에 이어 ‘햄릿’이 두 번째다. 박지일은 “친하지 않은 배우와 더블을 하는 것보다 재밌다”며 “경쟁심보단 나보다 이 역할을 돋보이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남명렬도 “같은 배역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2~3개월의 연습 기간을 거치자 두 배우는 어느덧 ‘맞춤 정장’처럼 꼭 맞는 폴로니우스가 됐다. 박지일은 “배우의 기질상 때론 조금 더 가고 싶은데, (손진책) 연출이 ‘오늘은 과하다’고 통제하기도 한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더 재밌게 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자 남명렬은 “그럴 리가 있냐”며 칭찬을 이어간다.
“박지일 배우는 지적이고 온갖 세상 고민을 다 쥐고 있는 인물을 많이 했는데, ‘바다와 양산’이라는 작품에서 동네 모든 일에 참견하는 낙향한 병든 작가 역을 한 적이 있어요. 그걸 보며 이 사람은 진짜 재밌는 연극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남명렬)
같은 폴로니우스이나 두 배우의 차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박지일은 “기럭지와 목소리, 체력 차이가 확실하다”고 강조한다.
“살아온 경험이 비슷해 공감하는 부분이 많지만, 사실 일상은 너무도 달라요. 생활습관이나 일상의 행동방식은 전혀 다르죠. 그러니 서로 다른 폴로니우스를 보게 될 거예요.” (박지일) “관객도 확실히 다르다고 느낄 거예요.” (남명렬)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지상의 세계를 관장하는 죽마고우 신들 같기도, 논쟁을 즐기는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같기도 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있는 오랜 지기다.
첫 만남은 1993년. 공통점이 많다. 남명렬은 대전에서, 박지일은 부산에서 연극을 했고, 연극만으론 ‘먹고 살기’ 힘들어 직장생활을 병행했다. 심지어 같은 부대, 같은 초소 출신이다. 게다가 “한 번의 이혼 후 재혼을 한 것도 공통점”이라고 시원하게 털어놓고 웃어버린다. 데뷔는 1993년. 산울림 소극장의 예술감독이었던 채윤일 연출가의 ‘호출’로 30대 중반에 상경했다. 1994년 말엔 서울 평창동의 으리으리한 대저택에서 두 달간 동거도 했다. “집 관리를 맡겼는데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남명렬 배우와 다른 친구(배우 김하균)까지 셋이 몰래 함께 지냈다”(박지일)고 한다.
다만 배우로의 출발이 같지는 않았다. 서울에서의 데뷔작 ‘죄와 벌’(1993)로 신인상을 휩쓸며 승승장구한 박지일의 10여년은 ‘꽃길’, 같은 해 ‘불의 가면-권력의 형식’으로 데뷔한 남명렬은 ‘가시밭길’이었다고 한다. 남명렬의 첫 수상은 2002년 영희연극상. 박지일은 “배우 인생의 그래프를 그리면 난 하강형, 남 배우는 상승형”이라며 호쾌하게 말한다.
오랜 지기이나 성향은 딴판이다. 남명렬 박지일의 삶의 태도나 연기관은 ‘냉정과 열정 사이’에 있다. 박지일은 60대에도 주인공 햄릿을 꿈꾸고, 새로운 도전에 주저함이 없다. 남명렬은 자신을 “주어진 대로 사는 배우”라고 했다.
“(박) 지일 씨는 배우로서 욕망하는 바가 많은데 저한텐 그런 게 별로 없어요. 그런데 배우는 적어도 어떤 배역을 해보고 싶다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전 유유자적 스타일이죠. 뛰어난 재능보다 주어지면 최대한 성실히 해내고자 했던 삶의 방식이 배우로서의 현재를 이끈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남명렬)
남명렬의 이야기를 듣던 박지일은 “성실함 속에 담긴 끈질긴 노력은 사실 존경받아 마땅한 장점”이라고 했다. “배우라는 직업은 놓지 않는 끈기가 중요한데 남명렬 배우는 지금껏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전 하고 싶은게 참 많아요. 무대에 서는 것 자체, 그 희열과 긴장을 너무나 갈망하고 즐기죠. 작품 욕심도 많죠. 저 역할이 좋아 보이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나도 햄릿을 하면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웃음)” (박지일)
대본을 마주한 뒤 곱씹고 뱉어내는 방식도 다르다. 남명렬은 “대본을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박지일은 “직관적으로 해석하는 열정적 배우”라고 한다. 박지일은 하지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대 연기는 뜨거움 속에서도 냉정하게 보는 것”이라며 “사실 나도 이성적으로 본다”며 웃었다.
“무대는 수많은 약속으로 구성된 만큼 약속의 수행 안에 얼마나 자유로운지가 중요해요. 무대에선 신들린듯 연기해야지 진짜로 신들려서는 안돼죠. 메소드라고 정말 신들린다면 단언컨대 그건 똥연기예요.” (남명렬) 친구의 연기론에 박지일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연기는 어차피 가짜”라며 “그 가짜를 인식해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연극 ‘햄릿’은 세대를 초월한 연기 합숙소다. 83세 이호재 전무송부터 40대 햄릿 강필석, 30대 이충주 루나가 어우러진다. 연습 현장은 연극계의 기틀을 다진 걸출한 배우들의 ‘연기 배틀’로 매순간 장관이다. 박지일은 “배우들이 한 자리에 앉아 돋보기를 쓰고 대본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나와서 대사를 하는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연기하는 것에 깜짝 깜짝 놀란다”며 그 현장에 함께 있다는 것이 종종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연극계의 ‘원조 브로맨스’ 이호재 전무송과 그 뒤를 잇는 남명렬 박지일이 한공간에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역사다.
“한 시절을 풍미하며 함께 이름이 오르내린 이호재 전무송 선생님과 20년 후배인 우리 두 사람이 한 연습장에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해요. 이곳에 두 분이 존재하는 것처럼, 20년쯤 지나 우리도 여전히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남명렬)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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