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47>] 돌아온 전쟁의 시대, 되돌아보는 美·英 전쟁의 정치경제학
미국의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미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미국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데 가장 극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1812년 미영전쟁’일 것이다. 이는 1812~15년 북미 지역에서 발생한 영국과 미국 간 전쟁을 말한다. 충돌의 실마리가 된 것은 양국 간 경제적 갈등이었고, 그 갈등을 고조시킨 것은 프랑스와 영국 간에 벌어진 나폴레옹전쟁(1799~1815년)이었다.
나폴레옹전쟁이 벌어지기 전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과 교역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자 영국은 미국의 통상 자유를 제한했다.
당시 연방 정치는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가 이끄는 친영국 성향의 연방당(현 공화당)과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이 이끄는 친프랑스 성향의 공화당(현 민주당)으로 양분됐다.
나폴레옹전쟁 미끼로 美 압박한 英
1801년 친프랑스 성향의 제퍼슨이 미국의 3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과 영국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나폴레옹전쟁 중이던 1805년 스페인 트라팔가르에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괴멸시킨 사건이었다. 해군력을 앞세운 영국이 프랑스의 주요 항구를 봉쇄하자,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를린칙령을 발표하고 영국 항구를 방문한 모든 선박을 적선으로 간주했다. 이후 1807년 영국이 모든 중립국 선박에 영국 항구에 기항해 면허를 취득하도록 요구하자, 나폴레옹은 밀라노칙령을 발표해 영국의 수색에 응한 중립국 선박의 나포를 승인하는 강경 조치를 했다. 중립국인 미국은 영국 명령에 복종하면 유럽 항구에서 프랑스에 나포되고, 나폴레옹의 명령을 따르면 공해상에서 영국 해군의 먹이가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됐다.
영국은 해군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나포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영국 해군은 미국 상선에 접근해 영국 탈영병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포획한 뒤 영국 해군에 강제로 입대시켰다. 급기야는 1807년 영국 군함 레오파드호가 미국 군함 체서피크호를 포격한 뒤 미국선원을 나포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미국에선 전쟁의 기운이 고조됐다. 친프랑스 성향의 제퍼슨 당시 대통령은 금수법을 통과시켜 미국의 모든 항구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수출입을 금지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미국에 더 큰 피해를 줬다. 영국은 미국에 대한 무역 제재를 강화했고, 미국의 4대 대통령 매디슨은 영국과 관계를 단절했다.
영국이 미국을 압박한 것은 나폴레옹전쟁이라는 명분 뒤에 숨긴 자국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영국의 제조업자, 해운업자들은 영국 해군이 자신의 경쟁자인 양키(미국)를 짓밟으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명분으로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것과 같다.
영국과 손잡은 '라스트 모히칸'
제임스 쿠퍼의 소설 ‘모히칸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는 한 세대 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1812년이 배경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당시 캐나다와 미국의 중간 지대에 놓였던 쇼니 인디언 테쿰세 형제는 미국의 서부 확장에 맞서 인디언 연맹을 결성한다. 오대호 연안의 9개 부족이 모였고, 오늘날 미국 지명으로 남아 있는 일리노이족, 마이애미족, 델라웨어족, 휴런족도 이 중에 포함됐다. 전쟁이 임박하자, 영국군 사령관은 빈약한 군사력을 보강하기 위해 이들을 끌어들였다.
한편 이 무렵 미국 연방의회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돼 있었다. 서부와 남부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삼던 공화당원은 영국과 전쟁을 요구했고, 제조업과 해운업을 기반으로 한 북동부 뉴잉글랜드인은 전쟁에 반대했다. 공화당 출신이었던 매디슨 대통령은 선전포고를 택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는 강경파(휘그당) 스펜서 퍼시벌 총리가 암살됐고 온건파(토리당) 로버트 젱킨스가 권력을 잡았다. 영국령 서인도제도 농장주들이 대미 금수조치에 불평을 해왔고, 영국의 국내 경기가 악화하자 젱킨스 내각은 대미 제재 철회를 결정했다. 미국의 선전포고를 이틀 앞둔 날 영국은 무역 제재를 철회했지만, 이 소식이 워싱턴에 도착하는 데는 한 달이 걸렸다.
인디언 쓰러뜨린 '변방의 법률가' 앤드루 잭슨
미국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미국의 전쟁 장관 윌리엄 유스티스는 “우리는 군인 없이도 캐나다를 점령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폴레옹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영국 정부는 미국의 적대 행위를 귀찮은 사건 정도로 여겼고, 캐나다에 대한 병력 지원을 소홀히 했다. 미시간 주지사 윌리엄 헐은 미국군을 이끌고 캐나다를 침공했지만, 영국·인디언 동맹군과 마주치자, 전투도 하지 않고 국경 너머로 도망쳤다. 미시간의 주도 디트로이트는 영국군에 함락됐다. 이후 미국은 여러 차례 장군을 교체하면서 나이아가라 침공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인디언의 분노는 다른 곳에서도 계속되었다. 1813년 미국 남동부 지역에서 크릭 인디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1814년 영국 해군은 보스턴의 입구인 체서피크만을 습격하고 뉴잉글랜드에서 조지아까지 봉쇄하며 해상에서 우위를 점했다. 1814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대법관 앤드루 잭슨이 민병대를 이끌고 앨라배마에서 크릭 인디언 병력을 격파하며 크릭전쟁을 끝냈다.
하지만 북부 지역에서는 전쟁이 이어졌다. 1814년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한 뒤 영국군은 북미 지역에 대규모로 파견됐고, 이들은 수도 워싱턴을 점령했다. 영국군이 남부의 중심지인 뉴올리언스를 공격하려 북부의 체서피크만을 떠나자, 뉴잉글랜드의 연방 당원은 굴욕적인 강화 조항을 포함한 하트퍼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로 인해 미국인은 뉴잉글랜드의 애국심과 연방당의 충성심에 의문을 품게 됐고 결국 종전 후 연방당은 몰락했다.
이후 러시아의 차르(군주) 알렉산더 1세가 중재를 제안했고, 1814년 벨기에 겐트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조약은 영토 변경 없이 전쟁 전의 국경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영국은 너무 지쳐서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고, 미국은 기존의 것을 잃지 않는 데 만족했다. 하지만 북미 대륙에서는 평화조약이 체결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전쟁이 계속됐다. 1815년 영국군은 뉴올리언스를 기습하려 했고, 매복하고 있던 앤드루 잭슨의 민병대에 괴멸됐다. 미국 상원은 만장일치로 겐트조약을 비준하고 축하 행사를 벌이면서도 앤드루 잭슨과 남부 민병대에 이를 알리지 않았다. 전쟁 후 캐나다는 영국 지배하에 남게 됐지만, 영국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미국의 자부심은 국가적 정체성으로 발전했다. 북서부 인디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미국의 서부 확장이 계속됐고, 앤드루 잭슨의 크릭전쟁 승리로 남부 지역은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미영전쟁이 이뤄낸 가장 극적인 결과는 잭슨이라는 변방의 법률가가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하면서 토착 귀족의 동의 없이 대통령에 당선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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