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 파적 <55>] 고급 호텔인가, 창살 없는 감옥인가: 실버타운의 심리학
아버지는 대학병원과 재활병원 혹은 요양병원을 오가는 6개월간의 투병 끝에 2023년에 돌아가셨다. 배우자인 어머니와 사별 이후 3년을 넘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투병 생활 내내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앰뷸런스를 동원해서라도 생전에 고향집에 한 번 모시고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물론 아버지의 말은 단순히 고향집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리가 아니라, 집에서 케어를 받으며 살고 싶다는 소망이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왜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을까. 자신이 살던 집은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람들이 지구상에 자리한 이래 최초의 조직이자, 가장 오래된 조직인 가족(family)이 함께 생활하는 인류학적인 복합 공간이 집(home)인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며 일상적인 활동을 한다. 내 집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하고 스타일에 맞춰서 인테리어를 할 수 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아버지가 물려준 소중한 선물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무리해 가면서 기꺼이 사들인 것일 수도 있다.
올해 팔십대 초반의 장인, 장모님도 비슷하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인해 걷기가 다소 불편하실 뿐, 아직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 두 분은 고향의 재산을 전부 정리하고 시설 좋은, 자식들이 있는 수도권의 실버타운(silver town)에 입소하시라는 자식들의 권고를 귓등으로 흘려 들으신다.
사람들은 낯선 곳에서는 불안하고 불편해한다. 안전과 보안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도 침해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포유류는 말할 것도 없고, 새나 물고기도 귀소본능(Homing Instinct)에 따라 해가 저물면 자신들의 둥지나 서식지로돌아간다. 외지나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친부모를 찾아 이역만리 찾아와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는 것도 귀소본능이 확대된 것이다. 이것은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서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산란하는 연어의 회귀본능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대학을 졸업하고 수십 년 만에 학교를 찾는 행사도,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의 홈커밍데이(homecoming day)라고 부른다.
우리 장인, 장모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두 분은 호텔처럼 안락하고 편안한 시설을 자랑하는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것을 왜 마다하실까. 팔순이 넘는 연세에 굳이 당신들 손으로 장을 보고, 밥을 해 드시고, 청소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하실까. 사실 실버타운은 일본에서 유래된 콩글리시이고, 미국에서는 ‘은퇴자 공동체(retirement commu-nity)’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은퇴자 공동체는 노인들이 자신의 집에서 머물면서 보살핌을 받는 홈 케어(home care)를 제외한 일체의 거주 시스템을 통칭한다.
미국 은퇴자 협회(AARP)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노인의 90%가 자신의 집에 살고 싶어 한다. 역으로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를 요양원 같은 은퇴 공동체에 보내는 것에 대해 대부분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개인주의에 익숙한 미국인이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에 가책을 받는다니 뜻밖이다.
사람들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등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단 들어가면 일상의 대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 익숙한 환경과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도 이별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 노인들에게 유발하는 불안감과 스트레스는 절대 가볍지 않다. 공동생활로 인한 집단감염의 우려도 있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나름대로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 개인적인 시간이나 공간 활용도 쉽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고 싶다’의 저자인 심리학자 브루스 후드의 말처럼,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율성과 통제감을 누리고 싶어 한다. 사람은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존재다. 몸을 움직일 조금의 근력만 남아있다면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타인에게, 규율에 강제받는 삶은 죽기보다 싫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다.
지하철 공용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은 안전 차원에서 자동으로 닫히게 조작시켜 놓았다. 그런데 닫힘 버튼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안내문이 있어도 끝까지 눌러대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탄 엘리베이터는 자신이 닫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닫을 수 없는 지하철 엘리베이터 문은 적어도 사람들의 통제 본능에는 반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실버타운은 어떨까. 실버타운은 보안 시스템이 강화되어 안전과 보안이 보장된다. 헬스장, 영화관, 도서관, 노래방 등 각종 편의 시설이 있다. 간호사나 의사가 상주해 노인들의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응급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다. 노인들끼리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각종 커뮤니티 활동도 가능하다. 그래서 비용이 많이 들고 가족과 떨어져 있어 다소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해도 기꺼이 실버타운을 택하는 이도 많다. 그럼에도 부작용 또한 만만찮다.
실버타운 생활을 일종의 크루즈 여행에 비유하는 이도 있다. 크루즈 여행도 실버타운처럼 다양한 활동과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한다. 음식과 식사도 고급스럽고 선택의 폭이 넓다. 그렇지만 크루즈 여행도 여행이다. 일시적인 것이다. 아무리 오성급 호텔의 안락함을 보장해도 크루즈 선상에서 일생을 보낼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실버타운 생활은 크루즈 여행과 꼭 빼닮았다. 매일 비슷한 음식, 같은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것은 고역이 될 수 있다. 풍성한 음식이 무제한 제공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어차피 집밥이 아니고 일상적인 외식이다. 질릴 수밖에 없다. 선상에 별도로 돈을 내야 하는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있는 이유다.
사교적인 모임보다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은 사람에게는 특히 가성비가 떨어진다. 각종 시설이 그림의 떡이다. 실버타운 생활을 얼마 못 하고 상당한 정도의 위약금을 물고 퇴소한 내 친구 A의 모친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사교적인 사람이라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실버타운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나 자식이 부유한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만날 때마다 왕년에 자신이 얼마나 잘나가던 사람인지, 자식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도 있다. 돈 자랑, 경력 자랑, 자식 자랑에 기가 질릴 정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올해 70대인 지인 B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 친구들 만나면 자식 자랑하려면 1만원 내놓고 하고, 손주 자랑하려면 10만원 내놓고 하라!”라고. 생존이 해결된 후의 번식은 동물의 본능이다. 그것도 번식 전략의 성공, 즉 ‘잘 지은 자식 농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과시 욕구의 하나가 된다. 여기에 재력과 명예에 대한 과시가 더해진다. 실버타운 입주자의 커뮤니티가 늘 건전한 사교 모임일 수만은 없는 것은 바깥 사회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노년을 자기 집에서 지낼 것이냐, 바깥 은퇴자 공동체에서 지낼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의지 차원을 넘어선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120세 시대를 맞은 지금, 우리나 우리 부모님은 골치가 아프다. 돌이킬 수 없는 생로병사, 그 불가역의 도상(途上)에서 불가피하게 택일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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