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두고 피도 눈물도 없다… 오너가 다툼에 멍드는 기업
재벌 분화로 분쟁 증가, 한국적 현상
분쟁 후폭풍, 투자 제약·주가 불안정
국내 산업계 고질병인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이 또 도졌다. 각 업계에서 번창한 한미약품(제약), 아워홈(식자재 유통), 한국앤컴퍼니(타이어) 경영권을 두고 으르렁대는 당사자는 부모-자식, 형제, 남매 사이다. 혈육보다 남남이 더 어울리는 오너 일가 간 다툼 속에서 회사 성장을 위한 '비전 경쟁’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사 장악을 건 오너 일가의 다툼 때문에 기업이 멍들고 있는 셈이다.
9일 재계에 따르면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은 창업주인 고 임성기 회장의 아내인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과 장녀 임주현 한미그룹 부회장이 올해 들어 추진한 OCI그룹과 통합이 발단이었다. 임 회장 장남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이사, 차남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가 반발하면서 분쟁이 불붙었다.
아워홈은 대표이자 창업주 고 구자학 회장의 막내딸인 구지은 부회장이 이사회에서 퇴출당하면서 경영권을 잃기 직전이다. 대신 구 회장 장남 구본성 전 부회장과 장녀 구미현씨가 회사를 차지하려고 한다.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그룹)도 지난해 말 형제간 다툼으로 몸살을 앓았다. 회사를 이끌고 있는 조양래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 조현범 회장에 맞서 첫째 아들 조현식 고문이 누나, 여동생과 뭉쳐 지분 확보에 나서면서다. 당시 조현범 회장은 조 명예회장 지원으로 경영권을 방어했다.
우선 경영권 분쟁 자체를 부정적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다. 회사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경영주를 밀어내고 다른 가족이 들어와 실적을 반등시키는 경영권 분쟁은 다른 주주나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환영받기도 한다.
경영권 분쟁, 때론 긍정적이나…
하지만 세 회사의 경우는 긍정 평가를 내리기 쉽지 않다.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 뒤엔 상속세 납부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생긴 견해 차이가 있다. 한국앤컴퍼니는 조현식 고문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시도한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눈총을 받았다.
비상장사인 아워홈 경영권 분쟁은 구본성 전 부회장이 안정적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구지은 부회장을 내보냈다는 시각이 많다. 아울러 회사 매각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모두 기업의 성장을 걸고 자질을 앞세워 싸운 '경영 능력 승부'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전 자본시장연구원장)는 "오너 일가가 소수 지분만으로 경영권을 두고 싸우는 건 회사를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비상장사라고 해도 경영 능력을 갖춘 사람이 경영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오너 일가 간 경영권 분쟁은 '한국적 현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국내 주요 기업은 가족 경영으로 몸집을 불렸고 오너 일가가 최대 주주로 머무르기보다 경영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런 환경을 바탕으로 기업 오너 일가가 창업주의 2세대, 3세대로 넘어가면서 이해관계가 복잡해진 만큼 경영권 분쟁도 많아졌다는 분석이다. 경영권 분쟁 배경엔 재벌의 분화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경영권 분쟁 소송은 2018년 143건에서 2023년 268건으로 뛰었다.
분쟁 방지하려면, '쓴소리 이사회' 필요
문제는 경영권 분쟁 후폭풍이다. 경영권이 이동할 경우 직원 등 내부 구성원은 고용이나 회사의 미래를 두고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아워홈 노동조합이 구본성 전 부회장 측을 향해 "생존권을 위협하는 오너들을 강력 규탄한다"고 비판한 게 대표적이다. 불확실성을 이유로 경영권 분쟁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 재계, 투자은행(IB) 업계 분위기로 회사의 성장도 제약을 받는다.
상장사의 경우 주주 피해가 일어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통상 경영권 분쟁은 단기적으로 주가 상승 요인이다. 오너 일가가 지분 확보를 위해 주식을 경쟁하며 사들이는 과정에서 주가가 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영권 분쟁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고 단기간 내 변동 폭도 커 일반 투자자가 투자하기 좋은 국면은 아니다. 장기적으론 경영권 분쟁이 주가에 악재라는 평가도 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경영권 분쟁을 겪은 기업은 체질이 나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가기도 한다"며 "회사 성장을 동반하지 않을 경우 주가는 분쟁 직후 반짝 뛸 수 있어도 결국엔 내려가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오너 일가 간 경영권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선 이사회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주 결정에 그대로 따르는 '거수기 이사회' 대신 '쓴소리 이사회'가 정착한다면 분쟁이 생기지 않고도 경영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정부는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현행 회사 외에 주주를 포함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사회 구성원이 회사 견제를 제대로 하라는 취지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는 "자본주의가 먼저 발달한 서구권 국가에서도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기는 한다"면서도 "다만 경영권 분쟁 단계까지 가는 경우는 적고 대신 이사회를 통한 경영진 교체가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3113560003588)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1414560005273)
박경담 기자 wa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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