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히스토리 ④] "최고의 럭셔리카를 만들자"..렉서스의 탄생
2024. 6. 10. 07:30
1983년 8월, 토요다 에이지 회장은 극비 회의를 열었다. 엔지니어링과 디자인, 전략 담당 임원들이 배석한 이 회의에서 에이지 회장은 담담함 속 절실함이 묻어나는 어투로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토요타가 세계 최고에 도전할 수 있는 완벽한 럭셔리카를 만들 수 있습니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가능한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에이지 회장이 럭셔리카 개발을 결심한 이유는 분명했다. 1960년대 이후 토요타는 미국에서 뛰어난 품질과 신뢰성을 얻었지만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수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고급차는 토요타의 '약한 고리'였다. 세계적인 경제 호황기가 도래하며 고급차 수요가 증가했고 기존 토요타의 소비자들은 고급차를 찾아 메르세데스-벤츠와 BMW로 이탈하고 있었다.
그렇게 토요타는 에이지 회장 주도 하에 고급차 프로젝트 '써클 F'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수행한 일은 연구원들을 미국 각지의 고소득층 거주지로 파견하는 일이었다. 연구원들은 오렌지카운티와 비버리힐스 등 내로라 하는 부촌에서 거주하며 고급차를 타는 사람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다.
이 과정에서 토요타는 '써클 F 프로젝트'의 원칙을 5가지로 압축했다. 첫째, 차급에 맞는 품위와 감성이 확실할것. 둘째, 최고의 품질을 실현할 것. 셋째, 높은 중고차 가치를 유지할 것. 넷째, 우수한 성능을 갖출 것. 다섯째, 최고 수준의 안전도를 갖출 것. 고급스럽고 가치있으며 안전하고 성능과 품질이 뛰어난 차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는 그렇게 본격화됐다.
토요타는 프로젝트에 1,400명 이상의 엔지니어와 2,300명 이상의 테크니션을 투입했다. 디자이너만 60명, 엔지니어링 팀은 24개 조직에 달했다. 첫 고급차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스즈키 이치로의 방향은 분명했다. 최고속도는 시속 250㎞, 공기저항계수는 0.28~0.29Cd, 시속 100㎞ 주행 시 실내 소음은 58㏈여야 한다는 것. 허용 오차 범위는 경쟁사들보다 2배 이상 보수적으로 잡았다.
그렇게 완성된 프로토타입차만 400대 이상이었다. 이 중 100대가 충돌테스트에 쓰였고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세계 각국애서 누적 430만㎞ 이상의 혹독한 테스트를 거쳤다. 내구성 확보를 위해 사막 한복판에 자동차를 몇 달간 방치하는 실험까지 했을 정도였다.
프로토타입의 풍동실험은 50번 이상 치렀다. 차 안엔 마이크를 달아 바람소리의 원인을 찾아냈다. 공력성능을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검토했다. 뒤 서스펜션처럼 눈에 띄지 않는 부분까지 바람을 염두에 둔 디자인을 녹여 넣었다. 프로토타입 개발에만 쓴 돈이 10억달러. 우리 돈 1조원 이상이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된지 4년째. 토요타는 첫 럭셔리카의 디자인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토요타는 곧장 뉴욕의 이미지 컨설팅 업체 '리핀코트 앤 마걸리스'에 브랜드 작명을 의뢰한다. 219개에 달하는 브랜드명 후보를 두고 뜨거운 논의가 펼쳐졌다. 추리고 또 추린 결과, 마지막에는 알렉시스, 칼리버, 차파렐, 벡터, 베론 5개만을 남겼다. 모든 관계자의 동의를 얻은 이름은 알렉시스(Alexis). 여기에서 A를 빼버리고 i는 u로 바꾼 렉서스(Lexus)가 최종 승인을 얻는다.
모든게 순조로워보였지만 여기서 돌연 제동이 걸린다. ‘렉시스(Lexis)’라는 법률 리서치 시스템을 소유한 ‘미드 데이터 센트럴(이하 미드 데이터)’이 토요타를 상표권 침해로 고소한것. 렉서스와 렉시스가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토요타는 50만 달러에 합의를 원했지만 미드 데이터 측은 1,000만 달러와 함께 15년간 추가 비용 청구 및 광고 권리 포기를 요구했다.
결국 두 회사는 법정에 섰고 판결은 절망적이었다. 법원은 렉서스가 렉시스 서비스에 피해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해 렉서스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판결했다. 토요타의 완전한 패배였다.
비상이 걸렸다. 첫 차를 공개하기까지 한 달 남짓 남은 시점에서 곳곳에 쓰기로 한 엠블럼을 모두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토요타는 급하게 TLD(Toyota Luxury Division)로 이름을 바꾸고 렉서스 로고를 모두 가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편으로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렉시스에 대한 인지도를 묻는 설문조사 등 다양한 자료를 모아 1989년 1월 1일 뉴욕 연방 고등법원에 항소한다. 신차 공개를 단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재판부는 심의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 판결했고 최종 판결이 나올 때 까지 렉서스 사용 금지 명령을 거둬들였다.
그렇게 TLD로 나올 뻔 했던 렉서스는 구사일생으로 1989년 디트로이트모터쇼에 등장한다. 최초의 렉서스였던 LS400이 6년만에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절제된듯 우아하고 날렵해보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의 LS에 호평이 쏟아졌다. 재판에서도 승소하며 마지막 걸림돌에서 벗어났다.
지금까지 거론되는 유명 광고 캠페인도 이 때 처음 나왔다. LS400 성능과 정숙성을 시험하기 위해 보닛 위에 샴페인 유리잔을 쌓고 240㎞/h로 다이나모 테스트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렉서스가 빠른 속도에서도 얼마나 정숙하고 편안하게 주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단적인 사례였다.
이런 노력 끝에 LS400은 고급차 시장에 처음 등장한 신예임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출시 첫 달 4,500대, 다음 달엔 3,400대로 인기를 이어갔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이를 두고 "렉서스가 독일 고급차에 악몽을 안겼다"라고 평가했다.
여기까지만 봐선 계속해서 탄탄대로를 달렸던 것 같지만, 이들의 DNA가 말해주듯 렉서스는 위기에서 더 빛났다. 출고 몇 달 만에 각종 결함이 터져나왔고 렉서스는 그간 출고한 8,000여대의 LS를 전량 회수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그리고 매우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국 현지에 위기전담반을 만들고 일본 본사를 포함한 렉서스 엔지니어 전원을 리콜에 투입했다. 목표는 미국인들에게는 어떤 날 보다도 중요한 크리스마스. 리콜 시작 후 단 20일도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조치를 완료하기로 결의했다.
각종 서비스도 더했다. 리콜 통지서가 도착하기 전 모든 딜러가 고객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원하는 장소로 찾아가 차를 회수하고 원하는 곳에서 차를 고쳤다. 수리가 끝난 차는 깨끗이 세차까지 하고 고급 휘발유를 가득 채웠다. 이미 기름이 있는 차에는 다음 주유에 쓸 수 있을 만큼의 수표를 남겼다. 그렇게 렉서스는 크리스마스보다 훨씬 앞서 리콜을 끝낸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를 두고 "렉서스가 고급차 시장에서 볼 수 없던 일을 해냈다"라고 평가했다.
주춤했던 LS400은 리콜 사태로 도리어 날개를 달았다. 이듬해인 1990년 경쟁 제품을 제치고 고급 대형 세단 판매 정상에 올랐다. 1991년 렉서스는 이에 힘입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고급차라는 타이틀을 획득한다. 그렇게 1세대 LS는 16만5,000대가 팔려나가며 고급차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정교함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특유의 능력은 오늘날의 렉서스가 있게 한 초석이었다. LS에 담긴 렉서스의 도전정신과 고객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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