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려거든 그곳으로 오라 [신영전 칼럼]

한겨레 2024. 6. 1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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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대형 병원에서 지난 6일 한 의료 관계자가 응급의료센터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언제 돌아온대요?” 정부가 내년 의대 정원을 1509명 증원하기로 확정한 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다 큰 사람들이니 알아서 하겠지요”라고 답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어른이니 스승이니 하는 것이 사라진 세상, 새삼스레 무언가 말하는 것이 부질없지만, 교수는 학생들이 단잠을 자고 있어도 강의를 계속해야 할 때가 있다.

오래전, 그저 ‘분위기 안 좋다’는 이유로 의대 본과 4학년이 3학년 전체를 몽둥이로 때리고, 또 그렇게 줄줄이 아래 학년을 때리던 이른바 ‘줄방망이’ 전통이 있던 때가 있었다. 이런 야만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나 보다. 최근 일부 의대에서 후배들에게 ‘공개 서약’과 ‘수업 거부’를 강요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대면 사과’를 요구하고 “학습자료 공유를 제한하겠다”며 으름장 놓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부디 그런 야만의 시간으로 돌아오지 마라. 싸움의 불문율은 괴물과 싸우더라도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의사 증원이 필요하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국민 건강 때문이라 보기에는 생뚱맞고, 규모도 크고, 준비도 안 된 대통령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였다. 그런데도 의사들이 이기지 못한 이유는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로 대변되는 국민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의사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보다 더 합리적인 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국민 눈엔 의사들의 이기심으로만 보이는 ‘1명도 증원 안 돼’ 주장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논리적 꼬임도 있었다. 의사를 많이 만들면 오지로 갈 것이라는, 이른바 ‘낙수효과’란 단어를 의사들은 모욕적이라 비판했지만, 한번도 증명되지 않은 “소수의 탁월한 사람들이 나머지 전체를 먹여 살린다”라는 ‘낙수효과’를 신념 체계로 삼는 이들도 자칭 ‘엘리트’들이다. 또 의사들은 2000명 증원이 너무 많다지만, 문재인 정부의 400명 증원도 반대했기에 설득력이 떨어졌다. 또한 다수의 전공의, 의대생이 조직 내 소수 선동 세력을 배제하지 못했다. 의사 전체를 대표할 수 없는 의사협회의 구조가 그 예다. 현 의사협회장도 11만5000명의 활동 의사 중 겨우 18.8%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하버드대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의 말처럼, 특권을 가진 소수 집단에 유리한 선거 방식은 극단주의가 합법과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올 수 있게 돕는다. 하지만 뭐라 해도 실패의 원인은 민심을 얻지 못해서다.

의사 집단은 이번 실패로 향후 인구 감소 시 정원 축소 약속, 전공의 근무조건 개선 등 반대급부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절실한 필수 의료 강화, 무의촌 해소와 같은 의료 개혁의 기회도 날려버렸다. 무엇보다 전공의들을 경영 수단으로 삼고, 개원의들을 ‘신데렐라 주사’, ‘불로 주사’ 등 돈벌이로 내모는 진짜 범인을 찾아 고발하지 못했다. 나는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질 수밖에 없고, 져야 하는 그곳으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 돌아오느냐보다 어디로 돌아오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는 10년 넘게 1, 2학년 의예과생들에게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라는 숙제를 냈다. 그때마다 답은 조금씩 달랐지만, ‘윤리와 실력을 갖춘 의사’, ‘사회에 봉사하는 의사’,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 의사’, ‘환자에게 사랑받는 의사’, ‘마지막 순간에는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의사’ 등의 답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의대생들이 돌아온다면 바로 이곳으로 오면 좋겠다.

오늘은 제37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다. 당시 나는 의과대학생들로 구성된 구급대의 상황실을 지켰다. 구급대의 역할은 최루탄 속으로 뛰어들어 다친 이들을 구하는 일이었는데 시민과 전경을 가리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다. 명동성당 안 농성 시민들을 치료하러 전경들을 헤치고 걸어갈 때, 심장은 미칠 듯 콩닥거리고, 성당 뒤 계성여고 학생들이 담 너머로 자기들이 먹을 빵과 우유를 던져주던 그 시간, 그곳으로.

영화 ‘박하사탕’에서 기성세대가 된 영호는 철교 위에 올라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러나 그는 순수했던 청년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가진 못해도 돌아올 순 있다. 명분은 환자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의사는 아픈 이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힘이 세다.

윤봉길은 집을 나서며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썼다. 성경 속 신은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오라”고 했다. 누군가 다시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돌아오라. 돌아오지 마라. 돌아오려거든 그곳으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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